[시론] 결합재무제표 의미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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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대기업집단의 결합재무제표가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발표됐다. 국제통화기금(IMF)위기 이후에 시행된 일련의 기업 구조조정 조치 중에서 기업의 경영투명성을 높이기 위한 제도 변화 중 하나다.

*** '그룹' 실체 인정하는 셈

기존의 법에서 이미 작성이 의무화돼 있던 연결재무제표와 차이가 있는 16개 그룹의 결합재무제표에 나타난 매출, 이익과 부채는 대체로 예상하던 바와 큰 차이가 없다.

그룹사간의 내부거래나 상호출자를 상계(相計)하면 당연히 매출액은 줄고, 자기자본의 합계도 줄어들 것이며, 따라서 부채비율은 높아질 것이다.

종합상사가 있거나 수직적 통합의 정도가 높은 기업집단은 내부거래가 많기 때문에, 결합된 매출액이 기존의 기업별 재무제표의 단순 합계보다 크게 낮아진 것은 당연하다.

또한 상호출자의 비율이 높은 기업은 그만큼 결합된 자본금이 줄기 때문에 부채비율이 높아지게 된다.

과연 결합재무제표를 작성해 발표할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찬반 양론이 있다. 반대하는 쪽에서는 현재 우리 정부가 요구하는 형태의 결합재무제표는 선진국에서는 갖고 있지 않는 특이한 제도라는 점을 지적한다.

예를 들어 일반적인 회계기준에서는 소유지분이 30~50%가 넘는 자회사만을 연결재무제표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반면 우리의 결합재무제표에서는 공정거래위원회가 판단하는 계열기업을 모두 결합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들은 이러한 회계정보는 경제적인 의미보다 규제의 성격이 더 강하다고 본다. 또한 이러한 모호한 기준으로 재무제표를 만들어 재무구조나 수익성을 나쁘게 공시해 기업이나 국가경제에 이득 될 것이 무엇이냐는 주장이다.

여기에 대해서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선진국에는 재벌이라는 기업형태가 없으니 우리 식의 결합재무제표가 필요없다고 주장한다.

가족지배하의 다각화된 기업집단이라는 특징을 가진 재벌이 있기 때문에 회장과 가족의 실질적인 지배아래 있는 기업들의 재무상태를 통합적으로 밝히는 것이 투자자들에게 유익한 정보를 주는 일이라는 주장이다.

기업집단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호출자.지급보증.내부거래 등을 자세히 밝힘으로써 시장에 더 좋은 정보를 주고, 있을 수도 있는 연쇄도산과 같은 사태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룹체제아래서 결합재무제표의 공시는 분명히 투명성을 높여준다. 또한 기업집단들이 전부터 외국계 은행에 대해서는 그러한 재무제표를 주어왔기 때문에, 표준화된 자료를 내외에 발표한다는 것은 진일보한 것이다.

그러나 결합재무제표는 과도기적인 성격의 회계정보다. 왜냐하면 그룹 중심의 경영이 약화되면 이 자료가 큰 의미가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여기에 공정거래 당국의 딜레마가 있는 셈이다. 한편으로는 선단식 경영을 하지 말라, 회장실이나 종합조정실을 없애라 하면서도 실제로는 회장실 내지는 구조조정본부를 상대로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현실이다.

결합재무제표의 작성의 주체가 그룹회장실이고 보면 이 자료의 작성은 정부가 회장과 그룹의 실체를 인정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되는 셈이다.

*** 현실적 재벌정책 펴야

차제에 정부나 공정거래당국이 목표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우선 실체가 있는 그룹이나 회장을 인정하고, 거기에 상응하는 제도적 장치를 만드는 것이 훨씬 더 현실적인 접근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구체적으로는 지주회사의 설립조건을 완화해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고 책임이 분명해지는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사실 지주회사제도가 정착되면 결합재무제표는 불필요해진다. 또한 이제는 30대 기업집단은 별로 의미가 없으므로 규제의 대상을 5대 내지 10대로 축소하고, 거기에 한국전력.포항제철.한국통신과 같은 (준)공기업도 포함시켜야 한다.

정부로서는 당장은 현대그룹 문제의 해결이 급선무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김대중(金大中)정부의 임기가 절반이 돼가는 이 시점에서 더 이상 정치적인 구호나 이념적인 고집에 얽매이지 말고, 실제에 바탕을 둔 재벌정책을 세워 추진해 나가는 것을 권유하고 싶다.

정구현 <연세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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