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경의선 복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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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일본이 경의선 철도 부설에 착수한 것은 러.일전쟁 발발 직후인 1904년 3월이었다. 병력과 군수물자 수송 이라는 당장의 필요성뿐만 아니라 식민지 경략(經略)과 대륙 침탈까지 내다본 포석이었다.

당초 조선은 프랑스 회사에 경의선 부설권을 내줬지만 자금부족으로 착공하지 못하자 전쟁을 구실로 일본이 강압적으로 부설권을 따냈다.

일본은 임시군용철도감부를 설치하고 철도대대와 공병 5개 대대를 투입, 용산~임진강 구간을 시작으로 노반공사에 들어갔다.

1905년 3월 대동강 철교가 준공되고 이듬해 최대 난공사였던 청천강 철교가 준공됨으로써 1906년 4월 용산~신의주간 4백99㎞가 완공됐다.

착공 7백33일 만이었다. 경부선에 이은 경의선의 완공은 일본이 계획한 한반도 '종관철도(從貫鐵道)' 의 완성을 의미했다.

철도청이 지난해 발간한 '한국철도 1백년사' 는 일본의 철도용지 수용은 탈취나 다름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땅 임자에게 형편없는 보상금을 제시하며 '수일내 떠나라' 고 통고하는가 하면 주인의 허락없이 삼림을 베어내고 무덤을 파헤쳤다.

수천명의 토지와 가옥이 몰수됐고 항의 과정에서 사상자가 속출했다. 또 수많은 조선인 노동자가 강제동원돼 터널굴착과 교량건설 등 위험하고 힘든 공사에 집중 투입됐다.

일제는 조선과 만주의 철도를 연결하기 위해 1911년 중국의 안봉선을 협궤에서 표준궤로 바꾼다. 때맞춰 압록강 철교공사가 마무리됨으로써 한.만 철도는 동일궤간으로 접속됐다.

이후 경의선의 운행구간은 만주 안동까지 연장됐고 남대문역과 창춘(長春)역을 주3회 왕복하는 특급열차가 운행에 들어갔다.

유라시아 국제철도의 일부로 경의선이 편입된 것이다. 경의선은 경부선과 이어져 부산과 시모노세키(下關)간 관부(關釜)연락선을 통해 일본 국내의 여러 철로와 연결됐다.

시인 강인섭은 '녹슨 경의선' 에서 "서울 부산 신의주까지/남북으로 길게 뻗어/발부리 채이는 아픔으로/머리끝까지 전율하던 경의선… 헐떡이던 기관차는 논두렁에 처박힌 채 파선의 잔해처럼 녹슬어간다" 고 통탄했다.

민족의 한과 분단의 상처가 서려 있는 경의선이 머지 않아 다시 개통될 전망이다. 남북 장관급회담에서 한반도 분단 이후 끊어진 채 방치돼 있는 문산~봉동간 20㎞ 구간을 새로 잇기로 합의했다는 소식이다.

복원되는 경의선 철마(鐵馬)를 타고 민족의 웅혼한 기상이 유라시아로 뻗어나갈 그 날을 기다려 본다.

배명복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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