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억 달러 헛돈 쓴 미 항공보안 강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미국이 2001년 9·11 테러 이후 400억 달러(약 47조원)를 들여 항공 보안을 강화했지만 테러 방지에는 무력한 것으로 드러났다. 정보기관들이 정보를 공유하지 않거나 무시해 예방할 수 있는 테러 기도를 막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 정보기관의 안이한 대응이 지난 25일 여객기 폭파 미수 사건에도 그대로 재연돼 9·11 테러의 교훈을 망각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29일(현지시간) 휴가지인 하와이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번 사건은 인적·구조적 실패가 하나로 뭉쳐진 것”이라며 “테러 기도 용의자에 대한 정보가 공유되지 않아 폭발물을 휴대하고 용의자가 비행기에 타는 사건이 발생했다”고 진단했다. 이어 “이런 중요한 정보가 공유됐다면 다른 정보와 합쳐져 용의자에 대한 더 완전하고 분명한 그림이 나왔을 것”이라며 “경고 신호들은 그가 미국행 비행기를 타도록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 정부 관계자도 “미 정보기관들은 용의자가 테러를 기도하기 전 그의 소재지와 계획에 대해 많은 정보를 갖고 있었다”며 “일부 정보는 부분적이고 불완전하지만 이를 잘 연결하면 그가 테러를 계획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고 밝혔다고 뉴욕 타임스(NYT)가 30일 전했다.

여객기 테러 기도가 일어나기 한 달 전 테러 용의자 우마르 파루크 압둘무탈라브의 아버지는 나이지리아 주재 미 대사관을 방문해 “이슬람 급진주의에 물든 아들이 행방을 감췄다”고 경고했다. 이에 따라 현지 대사관은 압둘무탈라브를 테러 의심자 명단에 올렸으나 미국 입국 비자를 취소하진 않았다. 55만 명이 올라 있는 이 명단은 탑승 금지 명단(4000명)이나 정밀검색 명단(1만4000명)보다 테러 혐의가 약한 사람들이 들어 있다.

한편 테러 기도 이후 항공 보안체계의 허점도 드러나고 있다. 미 교통안전국(TSA)이 2004년 대당 16만 달러를 주고 도입한 207대의 고성능 폭발물 탐지 장치는 대부분 고장나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전국 2200개 공항 검색대에 설치하려던 전신 투시기는 사생활 침해라는 반대 여론에 부닥쳐 40개 공항에서 시범 운영하는 데 그쳤다. 탑승객 명단과 테러 용의자 리스트를 검색하는 TSA 프로그램도 80여 개 항공사 중 18개만 채택했다.

여행 안전을 책임지는 TSA와 세관국경보호국(CBP) 국장은 오바마 정부 출범 1년이 지나도록 공석이다. 이번 테러 기도가 예멘 알카에다 세력의 지시에 의한 것으로 드러나며 관타나모 수용소를 폐쇄하고 수감자를 미국이나 해외로 옮기려는 계획도 차질이 예상된다. 수감자의 절반가량인 약 90명이 예멘 출신인데 이들을 예멘으로 보낼 경우 탈옥해 테러에 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

워싱턴·뉴욕=최상연·정경민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