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퍼스트레이디 왜 공개 안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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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지난 13~15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 정상회담 기간에 두 정상의 부부동반 만남이 이뤄지지 않은 점이 아쉬운 대목으로 남아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자신의 말대로 '은둔에서 해방' 됐지만 북한의 퍼스트 레이디는 끝내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궁금증을 낳고 있다.

김일성 주석은 간혹 퍼스트 레이디 김성애와 함께 공개석상에 출현한 적이 있다.

예를 들어 루마니아 전 대통령 차우셰스쿠 부부의 평양 방문 때나 1994년 미국 전 대통령 카터 부부 방북 때 부부동반의 만남이 있었다.

그러나 金위원장은 金대통령에게 파격적인 환대를 하면서도 한사코 부부동반은 피했다.

북한문제 전문가들은 그 원인을 金위원장의 특별한 체험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지적한다.

1970년대 초반 북한정계에 몰아친 金주석의 부인, 즉 金위원장의 계모 김성애의 '치맛바람' 에 따른 갈등이 金위원장으로선 중요한 체험이었다.

6.25 당시 김일성 수상과 재혼한 김성애는 1969년 2월 조선민주여성동맹위원장에 발탁되면서 정치적 월권행위로 문제를 일으켰다(金수상은 1949년 金위원장의 친모 김정숙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喪妻).

특히 김성애는 김일성이 1971년 1월 전국농업대회에서 "김성애의 얘기는 내 지시와 마찬가지" 라고 말한 대목을 빌미로 치맛바람을 휘둘렀다.

노동당 우위 사회인 북한에서 일시적이나마 김성애의 권력을 등에 업은 여성동맹이 당 위에 군림하는 듯한 현상까지 나타났다.

특히 이런 사정은 지방 정치무대에서 심각했다. 군(郡) 당 책임비서가 군여맹 위원장의 눈치를 보는 경향까지 나타났다고 한다. 여맹 조직망을 타고 지방 현황이 김성애에게 보고됐기 때문이다.

김성애는 '항일여성혁명가' 로 칭송되던 金위원장의 친모 김정숙을 언급한 문구를 삭제하거나 빨치산 원로들을 무시하는 경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녀는 또 金위원장이 1974년 2월 후계자로 내정된 후에도 '친애하는 지도자동지' 라는 공식호칭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金위원장은 김성애와 추종자들의 비행을 상세히 조사한 후 1974년 6월 평양시당 전원회의를 열어 김성갑(평양시당위원장.김성애 친동생) 등 김성애 추종자들을 정치무대에서 내몰았다.

당시 김성애도 2개월 동안 자모산 별장에 연금됐다가 풀려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뒤에도 '곁가지 때리기' 란 이름아래 김성애측에 대한 통제는 계속됐다.

金위원장은 이 과정을 통해 지도자 부인의 정치활동에 극도의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의 부인 김영숙은 '남편의 뒷바라지에만 충실한 가정주부' 로 알려져 있다.

해외인사로 金씨를 유일하게 만났던 영화배우 최은희(崔銀姬)씨는 金씨에 대해 "전통적인 현모양처(賢母良妻) 스타일" 이라고 회고했다.

金위원장 자신도 崔씨에게 "내 마누라는 집안살림밖에는 할줄 모른다" 고 말했다고 한다. 다만 金위원장의 장기 지방출장 때는 동행하는 경우가 간혹 있다는 증언도 있다.

정창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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