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포커스] 젊은 벤처사장들에게 고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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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1987년 말 LG 동료였던 민태홍씨와 방 한 칸 얻어 픽셀시스템(현재 조이닷컴)을 창업할 때 우리가 가진 것이라곤 10MB 하드디스크가 달린 IBM PC 한 대 뿐이었다.

그 당시로서는 지금과 같은 엄청난 파워의 PC가 나오리라고는 상상을 못했었다. 자본금 5천만원의 소프트웨어 회사는 그나마 규모가 있는 회사였고 주머니 돈으로 겨우 임대료만 낼 수 있는 정도로 시작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필자도 1백만원의 현찰이 창업자금의 전부였으니까. 이런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고 소프트웨어만 취급하면서 생존해온 기업이 과연 몇이나 될 지 궁금하다.

라면으로 끼니를 대신하면서 밤을 꼬박 세우는 지금의 테헤란 밸리 사람들은 성공의 희망이라도 있겠지만 그 당시 우리들로서는 하루하루 생존 그 자체를 위해 싸워야 했다.

그나마 일 자체에 미칠 수 없었다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지난 10여년간 각고의 노력 끝에 3D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할리우드가 알아주는 실력을 갖춘 디지털드림스튜디오의 이정근 사장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이렇게 우리 주변에는 지금의 벤처기업들이 누리는 호사를 감히 상상도 못해본 노병들이 있다.

한글과컴퓨터의 지금 모습에서도 지난 10년간 미래를 예견하고 투자한 선배들의 노력이 배어 나온다.

시대를 너무 앞서 많은 비난 속에 네띠앙을 창업한 것이나 검색엔진 심마니를 만들었던 일, 리눅스 미래를 예측해 한글 리눅스 버전을 개발하는 등 이찬진 사장을 비롯해 한컴에 몸담았던 선배들의 수많은 시행착오와 도전정신이 없었다면 지금의 한글과컴퓨터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뼈를 깎는 훈련이 뒷받침돼서일까. 최근 벤처열풍 속에 만들어진 강력한 자본시장은 이들에게 세계시장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갖게 만들었다.

그들의 바람은 우리 후배들에게 보다 나은 시장 환경을 만들어 한국 소프트웨어가 세계 시장에 우뚝 서는 것을 보고 싶은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없다.

디지털드림스튜디오도 3D 애니메이션 시장에서 한국을 하청국이 아닌 당당한 1~2위 나라로 만드는 데 일조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비췄다.

한컴도 적어도 인터넷과 오피스웨어로 세계시장을 넘보려고 한다.

안철수연구소도 백신프로그램 분야에서, 나모인터렉티브도 인터넷솔루션 분야에서 세계시장을 넘보고 있다.

이밖에도 수많은 1세대 벤처기업인들이 혹독한 성장과정과 자금의 뒷받침 덕분에 그 어느 때보다 자신감있게 뛰고 있다.

이제 막 좋은 기술을 가지고 벤처 사장이 된 기업인들은 기술을 담보로 든든한 후원자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돈을 아쉬워하지 않아도 되는 자본시장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 생각 없이 기술개발에만 전념하면 된다.

하지만 항상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다고 했던가. 그들에게는 분명 가질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노병들의 경험이다.

왜 군대에서 나이 어린 신참 소대장이 부임해오면 분명 계급은 높지만 선임하사의 경륜에 압도당하는 모습을 자주 보지 않았던가.

우리 사회는 역사의 고마움을 너무 모른다. 잘잘못을 따지는 것도 시대를 뛰어 넘어서는 안된다고 본다. 그 시대의 상황을 깊이 이해하는 가운데 역사를 배워야 하고 또한 그 역사 속에서 우리 미래의 지혜를 얻어야 한다.

모든 분야가 다 그렇겠지만 경륜과 창의, 그리고 능력이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발전하는 모

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지금 젊은 벤처기업가들이 기업을 경영하면서 미숙함을 드러내 임직원들이나 투자자들과의 갈등이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다.

역사를 통해 배우지 못하고 마치 자신만이 최고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젊은 벤처기업가들에게는 우리들이 가진 것 없이 겪었던 시행착오보다 훨씬 큰 실패가 자신들 앞에 도사리고 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의 실패는 나와 가족, 그리고 임직원들의 심적.금전적 피해가 전부였고 또한 그 규모도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투자자와 임직원들의 금전적 실패는 물론이고 성공에 대한 기회손실도 함께 고려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모르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무모한 도전이 벤처정신이라고 하지만 운전면허도 없이 운전을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자신의 역량에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는 것도 벤처기업가들의 능력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전하진 <한글과컴퓨터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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