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소프트 파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소프트 파워. 미 클린턴 행정부의 국방차관보였던 조지프 나이 박사가 처음 쓴 말이다.

얼마전 기고문에서 그는 정의했다. 강제보다 매력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어낼 수 있는 능력이 소프트 파워라고. "한 국가가 소프트 파워를 행사할 수 있다면 강제적 방법에 드는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정책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고 그는 말한다.

하드 파워가 소프트 파워와 조화를 이룰 때 힘은 극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이 슈퍼파워로 군림할 수 있는 배경이 단지 군사력이나 경제력 때문일까. 나이의 말대로라면 그건 소프트 파워, 곧 문화적 지배력이 뒷받침 됐기에 가능한 일이다.

문화적으로 내세울 게 없어서 소련은 냉전에서 패했다는 얘기다.

로마인이 지녔던 문화적 우월감은 "나는 로마시민이다 "(시비스 로마누스 섬)라는 한마디에 녹아 있다.

로마시민을 빼고 나머지는 모두 야만인이라는 자부심은 속국과 변방에 대한 사명감의 토대가 됐다.

한(漢).당(唐).송(宋).명(明)으로 이어진 중국의 제국적 권력 또한 문화적 우월감에 기초했다.

천자(天子)의 제국인 중국은 우주의 중심이고 나머지는 모두 야만으로 간주됐다.

중국인은 곧 문화인을 의미했다.

오로지 군사력에 의존했던 몽골제국은 피정복지 문화에 동화할 수밖에 없었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가치와 더불어 미국식 대중문화와 소비문화는 미국이 가진 소프트 파워의 원천이다.

미국은 영화와 텔레비전 프로그램 등 세계 영상물 시장의 4분의 3을 차지하고 있다.

대중음악은 말할 것도 없고 음식과 의상에서도 미국은 세계적 모방의 대상이다.

영어로 된 인터넷을 통해 미국은 사이버시대의 담론을 주도하고 있다.

매년 50만명의 유학생들이 미국으로 몰려가 미국문화를 전파하는 첨병이 되고 있다.

미국기업들은 해마다 2천억달러라는 천문학적 돈을 광고비로 쏟아부으며 세계인의 혼을 빼놓고 있다.

그들이 파는 것은 상품이 아니라 상징이며 정체성이다.

미국은 늘 마법사의 매혹적인 얼굴로 우리 앞에 나타나고 있다.

힘이 아닌 주술, 명령이 아닌 자발적 동의에 의해 우리를 굴복시키는 마력이 미국이 가진 소프트 파워의 비결이다.

지배당하면서도 지배되는 줄 모르게 우리 영혼은 미국에 길들여지고 있는게 아닐까. "기술적 진보의 시대에서 정신과 문화에 대한 가장 큰 위험은 공포와 증오를 연상시키는 적으로부터 오는 게 아니라 미소짓는 얼굴을 가진 적으로부터 온다." 영국 소설가 앨더스 헉슬리의 경고는 앞을 내다본 통찰이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