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남북시대] '특별보좌역'을 "임원장" 호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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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임동원(林東源)국가정보원장의 평양 잠행을 보여주는 1차 증인은 북한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 자신이었다.

평양 공동취재단이 2박3일간 서울로 중계한 TV화면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14일 오후 11시 20분에 이뤄진 공동선언 서명식 장면이었다.

서명이 끝난뒤 金위원장은 林원장을 불러 귀엣말을 주고받은뒤 잔에 가득 담긴 와인을 단숨에 비웠다. 林원장이 자리에 돌아가 앉자 金위원장이 “다 마셨느냐”고 물어봤고 林원장은 잔을 거꾸로 뒤집어 다 마셨음을 보여주자 와인을 직접 따라주기도 했다.

이에 앞서 1차 정상회담이 시작된 13일 오전 백화원 영빈관에서 林원장이 남측 각료들을 金위원장에게 소개하면서 일일이 악수를 나누는 장면이 있었는데 이는 김용순 노동당 통일전선사업담당비서가 林원장에게 소개를 부탁해 이루어진 것. 사전 면식 없이는 갑자기 연출하기 어려운 장면이다.

이 장면을 TV로 본 한 남측 인사는 “金위원장이 우리 수행원중 스스럼없이 말을 건네는 유일한 사람이 林원장”이라며 “이는 두 사람간에 사전 면식이 있었다는 얘기”라고 말했다.

林원장의 평양 잠행을 통해 형성된 임동원-김용순 커넥션은 공동선언 작성에도 상당한 역할을 했다. 특별수행원 자격으로 만찬장에 있었던 한 인사에 따르면 저녁 9시30분께 갑자기 김용순 비서가 나타나 金위원장에게 서류를 건넸다.

서류를 읽은 金위원장은 뭔가 지시를 했다.그뒤 金대통령도 林원장을 불러 지시를 내렸고 잠시후 金대통령과 金위원장은 두손을 함께 쳐들며 공동선언에 완전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林원장이 사용한 “대통령 특별보좌역‘이란 직함은 그가 북측과 ‘스페셜 커넥션’이 있다는 또다른 정황 증거다.그동안 북측은 수차례에 걸쳐 ‘국정원 해체’와 ‘국정원과는 상대 안한다’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따라서 국가정보원장 직명으로 林원장의 방북을 수용할 경우 북측은 자기 모순에 빠질 수 있었다. 남측은 이 상황을 피하기 위해 ‘특별보좌역’ 명칭을 고안해냈고 북측도 이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5일 백화원 마지막 오찬에서 金위원장이 林원장에게 ‘林국가정보원장’으로 부르는 대목이 TV화면에 나오기도 했다.

남북대화 경험이 풍부한 전문가들은 林원장의 평양 잠행에 대해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가상적국(敵國)인 북한 수뇌부와 정상회담을 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나서 정상회담의 ▲일정 ▲의전 ▲합의문 등에 대한 사전 정지작업이 불가피한데 林원장 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을 것이란 설명이다.

회담 전문가인 김달술(金達述·前남북회담사무국 자문위원)씨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지난 72년 이래 남북대화는 이후락(李厚洛), 장세동(張世東), 서동권(徐東權)등 역대 정보기관 책임자들이 주도해왔다.

최원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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