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고은의 방북기] 여권 없는 북행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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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대통령 1호기와 수행원 비행기는 분단의 벽을 넘어갔다. 황해도 서단 장산곶이 내려다 보였고 몽금포 쯤의 포구도 내다 보였다. 곧 순안비행장에 이르렀다.

나에게는 낯익은 곳이다. 착륙하자 뜨거운 햇볕이 쏟아지고 있었고, 환영식장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지난 30년 동안 '역사' , 혹은 '역사적' 이라는 말을 자주 썼다. 나 자신 역사와 문학의 차이를 무시할 때가 많았다.

현실이 막혀있을 때 현실의 길과 역사의 길은 늘 구별된다. 그럴 때 역사에 의지하는 하염없는 심정이 되기 십상이었다.

분단 55년을 살아오는 동안 때때로 우리 자신을 지지리 못난 민족이라고 자조하는 밤들이 있었다. 휴전 50년의 세월인데 아직 냉전의 유물을 그대로 존속시킬 수 밖에 없는 낡은 민족현실을 두고 무슨 얼굴로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가 자괴할 때도 있었다.

역사는 무엇 하나 가망 없는 정체(停滯) 그것이기도 했다. 1970년대초 하루 내내 소주를 마셔댔던 7.4공동성명의 잔치도 배반당했고, 90년대초의 이상적인 남북 기본 합의서 발표로 환호했던 기억도 흙속에 묻혀버렸다. 언어만 남아있을 뿐 그 언어는 거의 아무런 실천으로 이어지지도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같은 분단의 삶이라고 해서 분단고착 이외의 어떤 가능성도 배제된 것은 아니었다. 역사의 핵심은 알게 모르게 전진하는 데 있다. 그래서 분단 반세기는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그 분단의 역사는 장차 올 통일의 역사 전야이고, 어서 통일을 위한 불가결한 고행이던 것이다.

아마도 이런 힘찬 신념과는 따로 역사에의 긴 절망도 숨길 수 없다. 옛사람들이 말하는 천도무심(天道無心.하늘이 무심함)이 내 입에도 늘 붙어 있었다.

바로 그런 절망이 이제 사라지기 시작했다. 역사는 얼마든지 생명체이고 역사발전의 운동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이것이 정상회담 특별수행원이었던 내 감회인 것이다.

우리 민족에게는 힘껏 역사적이었다. 동시에 세계속에서는 모든 시선들이 집중되는 세기적인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서슴치 않고 이 일을 "한반도 현대사에서 가장 위대한 사건" 이라고 말했다.

아마도 장차 이루어내고야 말 민족통일이라는 가장 위대한 사건이 있기까지는 이 이상에 값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6월14일 이른 아침 대동강 능라도 바로 옆 초대소 숲길에서 나는 강만길 교수와 함께 있었다. 그 때 두 사람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라며 손을 잡았다. 그는 오랫동안 분단극복의 역사관을 이끌어왔고 나는 통일의 꿈을 늘상 슬프게 노래했다. 우리는 똑같이 67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새벽 4시30분쯤 깨어나 시 '대동강 앞에서' 를 쓴 것을 그에게 보여줬다. 우리는 어제의 일을 떠올렸다. 비행장에서 평양시내까지의 벅찬 감격 말이다.

17㎞의 연도 양쪽을 겹겹이 도열한 환영인파의 남녀노소는 온통 흔들리는 꽃술이었고 만세소리의 환호였다. 로동신문은 60만명이라고 보도했지만 북한 인사는 80만이 맞다고 했다.

지난 날 중국의 장쩌민(江澤民)주석이나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수상이 올 때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었다고 했다. 나는 두 팔을 번갈아가며 그 열렬한 환영에 손을 흔들어야 했다.

이번 정상회담을 수행하는 나는 하나의 원칙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부재자' 가 돼야 한다는 사실이다.

무슨 뜻인가. 정상회담 자체의 성공을 위한 환경의 한 부분이 나 자신이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어떤 독자적인 활동 따위로 회담의 작은 흠이라고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그렇게 기도하는 자세로 2박3일을 보냈다.

회담은 합의를 위한 숨가쁜 과정으로 이어졌다. 두 정상과 주요 공식 수행원들의 노고는 피를 말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그 회담은 물이 흐르는 듯한 회담 의지로 진행된 것이다.

이와함께 공동선언 밖의 논의들 역시 결코 쉬운 노릇이 아니었을 것이다.

둘째날 김대중 대통령 주최 만찬장은 인상적이었다. 두 정상이 팔을 번쩍 들어 손을 맞잡고 함께 연단으로 나아가 "잘 살아보자" , "통일을 앞당기자" 고 축배를 드는 광경은 모든 대립이 끝나는 역사의 절경(絶景)이기도 했다.

첫 날도 다음날도 두 정상이 머리를 맞대고 회담을 거듭하는 동안 우리는 빈 틈 없는 일정에 따라 만경대예술극장.만수대극장.소년궁전의 아주 높은 수준의 공연예술에 흠뻑 도취됐다. 3천만권의 책이 소장됐다는 평생교육장 인민대학습당도 다녀봤다. 컴퓨터연구소도 둘러보았다.

수행원들은 경제분야와 사회문화분야로 나눠 북측 인사들과 여러 제안에 대한 원칙적인 동의에 이르렀다. 동명왕릉 참배도 있었다.

북한예술의 본질은 명제(命題)로서의 흥(興)과 신명에 있다. 그것은 남한의 한(恨)에 대비되는 것 같다. 분단은 이 둘의 조화를 앞두고 자체적이었다. 북한예술은 민족형식과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를 내용으로 한다. 이는 그들의 주체사상을 통해서 그 극점에 이르고 있다.

물론 그들에게도 감정의 섬세한 가락이 있다. 다만 그것이 강렬한 북방정서 속에 녹아드는 것이었다. 앞으로 남북이 하나의 보편적 정서를 추구할 때 이 흥과 한, 한과 신명의 새로운 만남도 정상회담 이후의 민족예술적 과제가 아닐까 생각했다. 김정일 위원장의 말 몇마디를 소개한다.

"앞으로 북경을 거치지 맙시다."

"비방방송 중지합시다. 김대통령과 내 체면을 보아서라도."

"나는 좋은 것 좋다 하고, 나쁜 것 나쁘다 한다."

"둘이 서로 힘을 합쳐 밀어붙여야 남북 철문이 열립니다."

"우리 옛 정치인들 후회하게 만듭시다."

"김대통령을 (민족사 속의)추억의 대통령으로 만듭시다."

김위원장은 상대방의 의표를 찌르기도 하고 좌중을 사로잡기도 했다. 통이 컸다.

여기 한가지 덧붙일 것이 있다. 14일 밤 김대통령 주최 옥란관 만찬장은 공동선언 초안이 결실된 자리이므로 잔치 분위기가 무르녹았다.

이 때 강교수가 한광옥 비서실장. 박재규 통일부장관.박지원 문화관광부장관에게 알리고, 두 지도자에게도 알려서 시를 낭송하게 됐다.

다음날 낮 김위원장의 환송오찬이 대통령 숙소인 백화원에서 있었다. 그 때 나는 김위원장의 개별초청을 받았다. 나는 "다시 오겠다" 고 답례했다. 이는 물론 우리 정부의 승인으로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평양으로 갈 때 여권이 없었다. 평양에서 서울로 돌아올 때도 그랬다. 이 커다란 상징은 함께 사는 일과 하나로 사는 일의 무한한 행복을 재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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