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몸짓으로 말한 김정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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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6월 13일 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이 평양에서 만난 장면은 그 자체가 메시지다.

이는 북한도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을 남한.세계 및 북한주민에게 생생하게 전달한 것이다.

남북정상회담의 첫날에 나타난 이 인상적인 시작이 남북관계를 정상화하는 계기가 되길 우리는 기대한다.

金대통령을 맞이하기 위해 金위원장이 직접 공항까지 나왔고 숙소까지 자동차를 동승한 것은 실로 의례적인 사건이었다.

이처럼 파격적인 예우를 몸소 과시함으로써 김정일은 남한.전세계 및 북한주민을 향해 그의 지도력과 분명한 메시지를 전했다.

그는 金대통령을 직접, 환영했고 북한인민군 의장대로 하여금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국가원수에 대한 사열과 분열을 거행케 한 것은 남북관계를 정상화하겠다는 뜻을 표시한 것이다.

이러한 의식절차는 단순히 상징적인 의미를 넘어 金위원장이 실질적으로 남북관계를 개선하겠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金대통령에 대한 신뢰를 실천했?동시에 한국 국민에게도 대남(對南)정책을 화해협력 방향으로 선회하겠다는 것을 말해준다.

진실로 북한당국이 대남정책을 근본적으로 변경할지는 좀더 두고 보아야 하겠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정상회담에서는 남북관계를 정상화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온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가운데 金위원장이 처음으로 생중계되고 있는 대중매체(특히 TV) 앞에 나와 金대통령을 영접한 것에 우리는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는 전세계를 향해 북한이 이제 개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올들어 북한은 이미 이탈리아.호주와 국교를 정상화했으며 현재도 필리핀.캐나다 등 여러 나라와 수교협상을 실시하고 있다.

지난달 말 金위원장은 중국을 비밀리에 방문했고 베이징(北京)의 전자공단을 시찰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북한도 시시각각으로 달라지고 있는 정보기술을 도입하지 않고서는 당면한 경제난을 극복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돌이켜 보건대 1980년대말에 냉전이 종식될 때 북한은 체제생존을 위해 남한과 고위회담을 실시했던 것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21세기 초에 가속화하고 있는 경제의 세계화에 직면한 북한은 경제회복을 위해 고립을 탈피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도 북한은 먼저 남한과 교류협력의 길을 터야 한다.

더욱이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북한당국이 이상과 같이 남한과 전세계에 대해 취한 행동을 북한주민에게 직접 방영한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金위원장이 북한도 변해야 한다는 사실을 주민에게 알리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실제로 평양시민 중 약 60만명이 金대통령을 환영하기 위해 가도에 나왔고 그들의 모습을 북한방송은 그대로 보도했다고 한다.

이러한 조치는 종전에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대외개방을 시도하는 것이 중국과 베트남에서처럼 대내적으로도 개방정책으로 이어질지는 앞으로 우리가 주시해야 할 중요한 부분이다.

이상과 같이 북한은 남북정상회담을 기해 변화의 징조를 보이고 있다.

이 긍정적 추세가 앞으로 남북관계를 정상화하고 북한이 세계에 건설적으로 편입하는 과정으로 출범하길 기대한다.

긴 안목에서 볼 때 남북평화협력 과정은 이미 시작됐다. 이것을 제도화해 결실을 보는 과제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모처럼 성사된 이번 회담에서 이 과정을 이행하는 기본틀이 마련됐으면 좋겠다.

한편 우리는 지금 느끼고 있는 충격과 흥분을 넘어 북한의 변화가 수반할 도전에 대해 슬기롭게 대처해야 할 것이다.

바라건대 이 첫 정상회담에서 이산가족의 상봉과 평화협력을 실천하는데 작은 진전이 이룩돼야 할 것이다.

이 이상으로 너무나 큰 기대를 하는 것은 금물이다. 중요한 것은 이 귀중한 첫 만남에서 남북관계를 정상화하는데 방향을 제시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과정을 출범시키는 일이다.

첫 숟가락에 배가 부를 수 없듯이 55년간의 대결이 단 한번의 정상회담에서 모두 해소될 수는 없는 것이다.

양측이 앞으로 계속 만나고 신뢰를 구축할 수 있는 초석을 확고하게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

안병준 <연세대 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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