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 '시라크-조스팽' 동거의 교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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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프랑스 대통령인 자크 시라크와 총리인 리오넬 조스팽이 '적(敵)과의 동침' 에 들어간지 3년이 지났다.

1997년 5월 총선에서 좌파연합이 승리를 거두면서 프랑스 제5공화국 들어 세번째 동거(同居)정부가 탄생했다.

좌파로 기운 민심을 확인한 시라크는 사회당 당수인 조스팽을 총리로 지명했고 조스팽은 사회.공산.녹색당 등 좌파연합 일색으로 새 내각을 출범시켰다.

우파 대통령과 좌파 총리가 한 이불속에 사는 '코아비타시옹' (동거)체제가 시작됐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 밑에 이회창(李會昌)내각이 들어선 꼴이다.

이달 초로 집권 3주년을 맞은 조스팽 총리는 행복한 표정이다. 실업률이 9년만에 처음으로 10% 아래로 떨어졌고 경제성장.경상수지.재정수지.인플레 등 각종 경제지표에 파란불이 반짝이고 있다.

국가개입주의 노선을 견지해 온 프랑스는 '제3의 길' 을 좇아온 영국(1.7%)이나 독일(1.5%)을 능가하는 2.4%의 실질성장(99년)을 기록하면서 유로권의 경기호황을 주도했다.

젊은층을 겨냥한 적극적 고용확대 정Ⅰ?주당 35시간 근로제 도입효과에 힘입어 실업자가 3년새 70만명이 줄었다. 넘쳐나는 재정흑자로 용처(用處)를 고민할 판이다. 국정의 비효율과 낭비를 우려하던 동거정부 아래서 나라는 더 잘 굴러가고 있다.

조스팽의 미소 뒤에는 여론의 높은 지지가 있다. 74년 프랑스에 체계적 정치여론조사가 도입된 이래 집권기간 내내 50% 이상의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는 첫 케이스가 조스팽이다.

프랑스 정치판의 통설인 '권불(權不)3년' 의 신화도 깨졌다.

집권 6개월째부터 지지율이 떨어지기 시작해 1년 후면 50% 아래로 곤두박질하는 것이 그동안의 관례였다.

이대로만 가면 2002년 대선(大選)의 승리가 눈에 보인다고 자신감을 가질만 하다. 그러나 인기가 높은 건 조스팽만 아니다.

지난 95년 취임 이후 바닥까지 떨어졌던 시라크의 인기가 동거정부 출범과 함께 상승세로 돌아서 지금은 조스팽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각축을 벌이고 있다.

두사람이 맞붙게 될 차기 대선은 결과를 점치기 어려운 대접전이 될 전망이다. 동거정부 아래서 시라크와 조스팽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상생(相生)의 정치' 다.

두사람의 '윈-윈' 게임은 동거정부에 대한 프랑스 국민의 높은 만족도에 기인한다.

국민의 65%가 현재의 동거정부가 시라크의 임기말까지 유지되기 바란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헌법상 대통령의 고유영역인 외교.국방을 맡고 있는 시라크는 든든하고 인간적인 가장(家長)의 이미지를 풍기고 있다.

내정을 책임지고 있는 조스팽은 빈틈없이 집안살림을 챙기는 깐깐하고 유능한 주부같은 인상이다.

부부싸움이라도 하듯 가끔씩 티격태격하기도 하지만 판을 깰 정도는 아니다. 둘다 손해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다.

"좌파 지지자든 우파 지지자든 두사람에 의해 잘 대변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 이라고 올리비에 뒤아멜 교수(파리1대학)는 국민이 만족하는 배경을 설명한다.

대통령 중심제에서는 대통령을 배출한 정당이 언제나 여당이다. 여당이 총선에서 패하면 여소야대(與小野大가)가 돼 국정운영이 차질을 빚게 될 수 있다. 이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인위적 정계개편이 횡행해온 것이 우리 현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프랑스에는 여소야대가 없다. 총선에서 승리한 정당이 무조건 여당이 돼 국정을 장악한다. 직선으로 선출된 대통령의 소속당이 여당인 경우 대통령은 막강한 권한을 휘두르지만 야당이 되면 바지저고리 신세를 각오해야 한다. 실권은 동거정부의 다른 한 축인 총리가 쥐게 된다. 지금이 그런 상황이다.

프랑스 대통령의 임기는 7년인데 비해 국회의원의 임기는 5년이다. 구조적으로 동거정부가 탄생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대통령 임기를 5년으로 줄이자는 논의가 진행 중이다.

독점적.배타적 권력욕을 포기할 때 동거정부는 굴러갈 수 있다. 상대를 인정하고 권력은 공유하는 것이라는 믿음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하루하루가 대립과 분란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상생은 커녕 '공멸의 정치' 가 될 뿐이다. 전부 아니면 전무(全無)라는 파멸적 독선과 아집에서 벗어나 공존과 공유의 철학을 받아들일 때 정치도 살고 나라도 살 수 있다.

시라크-조스팽 3년 동거의 교훈이다.

배명복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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