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이상동몽' 남북 정상회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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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남북 정상회담 개최가 얼마 남지 않았다. 이 시점에서는 현실을 존중하면서 우리가 취해야 할 기본 방향을 차분하게 정리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첫째, 국제사회의 급변에 비춰 남북관계의 변천, 특히 공산주의 붕괴 이후의 변화과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90년 김일성이 신년사에서 제의한 남북 최고위급 회담, 91년 남북 기본합의서 서명, 94년 정상회담 합의 등 일련의 상황진전의 고찰이 중요하다. 89년 동구 공산주의 몰락 이후 국제사회에서 북한의 고립과 위기는 심화하고 있었다.

중국의 시장경제는 날로 발전하고 북.소 관계는 악화됐다. 김일성은 경색됐던 남북관계의 개선이 북한정권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김정일은 반세기 동안 굳어진 김일성 개인숭배체제를 자신의 것으로 전환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국방위원장에 올라 최고통치권을 장악한 98년 9월께를 이 작업이 완료된 시점으로 볼 수 있다. 김정일은 이제 남북 정상회담을 할 필요는 물론 여유도 갖게 된 것이다.

84년 미국 정보기관이 문제삼기 시작한 북한의 핵무기는 원래 공세적 목적으로 출발했겠지만 공산주의 몰락 이후에는 자기 방어적 목적에 못지 않은 비중을 두었을 것이다.

핵과 미사일 등 대량 살상무기만이 고립.약화된 자신을 보호하고, 존재를 인정받으며, 국제협상 능력을 확보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카드로 간주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오늘날 북한을 변화시키고 있는 가장 결정적 요인은 국제사회의 개방압력이며 경제난은 이것을 가중시키고 있다.

당장은 남한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이 점은 정상회담에서 우리측이 유의해야 할 핵심사항을 말해준다. 우리의 목적은 냉전구조 해체인 반면 북한의 당면목표는 경제지원 확보와 김정일 체제의 강화다.

이렇게 남북한의 목표가 다르지만 상호주의는 가능하다. 우리의 경제지원에 대해 북한은 진정한 평화공존의지로 화답해야 하고 이산가족문제에 성의를 보여야 한다.

남한의 경제지원은 현실적 제약을 존중해서 결정돼야 하며 일정규모 이상에 대해서는 국회의 동의를 거쳐야 할 것이다.

둘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질서로 나아가는 세계사회의 발전을 주목하면서 새삼 상기해야 할 점은 우리 체제의 내실화 필요성이다.

북한 체제 인정을 통한 평화공존 추구는 바람직하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확고한 신념 없이는 평화공존도 불가능하다.

이 점과 관련하여 이번 정상회담을 전후해 남한 체제의 가치와 이상 및 법치주의 차원에서 문제가 될 만한 외교 행위를 경계해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체제수호와 관련된 법이 엄존하며 북한과는 정전상태에 있다.

셋째, 한.미 관계를 더욱 다져야 한다. 존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명언처럼 우리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국제사회에서는 다른 나라들과 더불어 사는 방법을 잘 배워야 한다.

미국은 오늘날 세계질서를 압도하고 있으며 우리의 가장 중요한 우방이다. 한.미 양국의 대북 정책은 조화가 최선이다.

미국의 대북 정책은 '조건부 연계(conditional engagement)' 로 현실주의를 존중하고 있다.

예컨대 대북 경제제재 완화는 매우 제한적이며, 핵.미사일 개발 중지 등 대가를 확실히 요구하고 있고, 테러 지원국가 명단에 여전히 포함시키고 있다.

정상회담을 불과 며칠 앞둔 시점에 김정일이 중국을 방문한 것도 봉남통미(封南通美)전략의 한계를 실감하면서 한.미 관계를 견제하고 정상회담의 수확을 올리려는 시도로 보인다.

넷째, 김대중 정부는 대북 정책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국익차원에서 적극 수용해야 한다.

정상회담 전후를 막론하고 남한 내 비판세력의 존재는 정부의 대북협상 능력을 강화할지언정 해가 될 수 없다. 야당의 우려도 최대한 존중해 힘의 결집을 이뤄야 할 것이다.

포용정책은 북한의 변화를 적극 수용하려는 의지를 통해 남북교류 확대와 신뢰형성에 기여해 왔다. 세계사회의 변화방향에 부합하는 접근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정책의 생명은 현실성이다.

비전의 정책이 현실적 문제들을 간과해 실패한 예들을 세계사는 수없이 기록하고 있다.

안영섭 <명지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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