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고전학파 이끈 폴 새뮤얼슨은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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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경제학계의 큰 별이 졌다. 13일(현지시간) 타계한 폴 새뮤얼슨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가 2005년 3월 예일대 졸업식에 참석했을 당시의 모습. 그는 1940~60년대 경제학 분야의 최고 권위자로서 현대 경제학의 초석을 다진 인물로 꼽힌다. [AP=연합뉴스]

13일(현지시간) 타계한 폴 새뮤얼슨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 교수는 1970년 제2회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다. 경제학에 미적분 등 수학적 개념을 도입, 동태분석·정태분석 등을 체계화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노벨상 위원회는 “경제학의 일반적인 분석과 방법론의 수준을 끌어 올렸으며, 경제 이론의 상당한 부분을 다시 썼다”고 평가했다. 당시에는 새뮤얼슨을 위해 노벨 경제학상이 만들어졌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의 학문적 영향력이 대단했다.

그는 고전학파의 미시적 시장균형이론과 케인스의 거시경제정책이론을 접목시킨 ‘신고전학파’를 이끌었다. 완전 고용을 위해서는 정부의 개입이 필요하지만, 일단 완전 고용이 달성되면 수요·공급이라는 시장의 메커니즘에 맡겨야 한다는 게 그의 이론이다. 이질적인 두 학파의 이론을 접목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의 독특한 이력이 자리 잡고 있다.

1915년 인디애나주에서 태어난 새뮤얼슨은 17세에 자유주의 경제학의 본산이었던 시카고대에 입학했다. 하지만 그는 시카고대 교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석·박사과정을 하버드대에서 마쳤다. 하버드대에서 그는 케인스학파였던 앨빈 핸슨 교수에게 배웠다. 동시대 경제학계를 함께 풍미했던 밀턴 프리드먼(1912~2006)이 시카고학파의 자유지상주의에 빠져든 것과 달리, 새뮤얼슨은 이런 다양한 학문적 경험을 토대로 경제학을 종합할 수 있었다.

그는 1940년 MIT에서 강의를 시작한 지 6년 만에 정교수가 됐고, 이후 평생을 이곳에서 강의하며 MIT 경제학과를 세계 최고 수준으로 키웠다. 그가 대학원에서 가르쳤던 학생 중 로런스 클라인, 조지 애컬로프, 조셉 스티글리츠가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다. 그의 제자였던 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은 “폴 새뮤얼슨은 경제학의 가장 위대한 스승 중 한 명”이라면서 “그의 타계를 애도한다”고 말했다고 AP통신은 전했다.

새뮤얼슨은 미국 정가와도 인연이 깊었다. 그는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과 린든 B 존슨 전 대통령 재임 당시 공식 직함은 없었으나, 실질적인 경제고문을 맡았다. 케네디 전 대통령은 당선 직후 그에게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 위원장 자리를 제안했으나 새뮤얼슨은 이를 거절하고 평생 학계에 남았다. 그는 중국과의 교역 확대를 강력히 주장해 2001년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이끌어내는 데 한몫했고, 2004년 발표한 논문에서는 세계화가 미국의 생활수준을 반드시 높여주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새뮤얼슨은 같은 경제학자의 길을 걸었던 로버트 새뮤얼슨의 동생이며, 현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국가경제회의(NEC) 의장을 맡고 있는 로런스 서머스가 그의 조카다. 유족으로는 부인과 6명의 자녀 및 15명의 손자·손녀가 있다. 장례식은 비공개로 진행되나 MIT는 공개 추도회를 준비 중이다.

손해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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