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마장은 희노애락 삶의 축소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3면

대지를 진동시키는 말발굽 소리, 거친 말 호흡소리, 구름같이 몰려든 관중들의 함성, 0초1을 다투는 피말리는 승부가 끝난 뒤의 환호와 탄식. 경마가 열리는 주말이면 과천 서울경마공원은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룬다.

1천5백여마리의 경주마와 82명의 기수들이 만들어내는 승부의 세계. 그 속에서 2만9천여 관중(하루평균 입장 인원) 들은 눈을 부라리며 저마다 승부수를 던진다.

서울경마공원이 하루 거둬들이는 돈은 1백35억여원. 전국 24개 장외발매소까지 포함하면 자그마치 4백20억여원이 판돈으로 뿌려진다.

이중 72%에 해당하는 3백억여원이 새로운 주인을 찾아 가다보니 희비가 엇갈리게 마련. 말(馬)도 많고 말(言)도 많은 서울경마공원은 인생의 희로애락이 교차하는 삶의 축소판과 다름없다.

기수는 '경마장의 꽃' 으로 불린다. 지난해 78승으로 최우수 기수로 선정됐고 올해 역시 14일 현재 24승으로 다승왕 선두를 달리고 있는 박태종(36)기수는 경마장이 만들어낸 꽃 중의 꽃이다.

1m50㎝.48㎏의 왜소한 체격으로 13년 경력 동안 일곱차례 중상에 시달리면서도 그때마다 꿋꿋하게 다시 일어선 '작은 거인' 이다.

지난해 상금 수입이 기수 가운데 가장 많은 1억4천8백만원으로 한달 평균 1천3백여만원을 벌어들였다.

웬만한 프로스포츠 선수를 능가하는 금액이다.

"기수를 택하지 않았다면 이처럼 넉넉하지 못하겠죠" 라는 박기수는 경마공원에서 가장 행복한 사나이다.

경마공원 정문을 들어서면 10만원짜리 수표를 현금으로 바꿔주는 아주머니 10여명과 마주친다.

발행한 지 1주일이 넘은 수표는 마사회가 취급하지 않기 때문에 이들은 정문 밖에서 수표 한장에 3천원을 떼고 현금으로 바꿔준다.

강모(59.여)씨는 여기에서 벌어 두자녀를 대학까지 보냈다며 만족스러운 표정이다.

"모르긴 몰라도 한달에 3백만~4백만원 정도 수입을 올릴 것" 이라는 게 강씨 고객들의 귀띔이다.

지난 14일 4층 관람대에서 세종류의 예상지를 뒤적이며 베팅전략에 몰두하던 이종완(가명.65.무직)씨는 퇴직 후 시작하게 된 경마에서 5년 만에 가산을 완전 탕진, 경마에 대한 분노감에 한때는 경마공원을 폭파할 마음까지 가졌다고 털어놓았다.

요즘들어서도 자신을 파탄으로 이끈 경마를 여전히 끊지 못하고 경마공원을 찾는 자신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다.

1984년 장난으로 경마를 시작해 첫 베팅에 7백만원을 맞힌 뒤 '이처럼 큰 것이 없구나' 하는 생각에 지금껏 경마를 끊지 못하는 오창환(가명.48.무직)씨 역시 마사회와 자신에 대한 미움으로 가득 차 있다.

가족.친지의 부동산과 친구들의 돈을 끌어 써 모두 10억원을 잃었다고 주장하는 오씨는 이혼까지 당하고 친구들도 멀어지게 만든 마사회에 취직이라도 시켜달라고 탄원해놓은 상태. 오씨는 노숙을 하면서도 경마는 구경해야 속이 풀리는데 교통비와 입장료(8백원)도 없을 때는 정말 자신이 미워진다고 토로했다.

개인택시를 몰다 손님을 따라 우연히 경마를 시작했다는 김성원(가명.42)씨는 "한몫 잡기 위해 택시를 담보로 해 받은 5백만원을 송두리째 날려 지금은 일반택시를 모는 중" 이라며 한숨지었다.

본전을 찾기 위해 소액배당은 멀리하고 남들이 찍지 않는 고액만을 좇다보니 금세 벼랑끝이 보이더라는 것. 그러면서도 김씨는 "지난달 운좋게 1천만원을 땄다" 며 "좀더 힘을 내 8천만원만 보태면 본전" 이라고 열을 올렸다.

1층 관람대에는 남들이 버린 마권을 열심히 주워담는 60대 노인이 눈에 띄었다.

뚝섬 경마장 시절부터 20년 이상 경마장의 '최대공로자' 였다고 자신을 소개한 이 노인은 실수로 버려진 적중 마권을 골라내 상금을 대신 타내 생계를 꾸리고 있다.

이같은 실수는 주로 초보자들이 저지르기 때문에 이들이 몰리는 1층 관람대는 자신과 같은 사람들로 마권 줍기 전쟁이 벌어질 정도라며 한숨 짓는다.

가족들의 얼굴을 잊어버린 지도 오래됐고 만나고 싶은 친구도 없기 때문에 홀가분하다는 이 노인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글썽거리며 눈자위가 붉어졌다.

경마에 죽기 살기로 매달리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요즘 들어서는 건전한 오락으로 즐기려는 계층이 심심찮게 늘고 있다.

경마를 즐기는 인사 중에 만화가 배금택(51)씨가 있다. 93년 만화 소재를 찾다가 경마에 입문하게 됐다는 배씨는 "베팅에서 지더라도 돈을 잃었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며 "긴장감을 갖고 게임을 즐겼다면 그에 대한 대가로 생각해야 한다" 는 지론이다.

배씨는 경마에 눈을 뜬 98년부터 절대 고액 베팅을 삼가고 하루 3~4경주 이내에 소액을 걸며 확실하게 즐기는 데 더 신경을 쓴다고 한다.

변수가 워낙 많기 때문에 고액으로 승부하기에는 위험부담이 크다는 것이다. 배씨는 또 경마일마다 마계부(馬計簿)를 작성한다.

일별.월별.연별로 결산을 하는데 이는 베팅 한도를 넘지 않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다.

배씨는 마계부 작성 이후 98년 5백여만원, 99년 2백여만원의 순수익을 올려 '무욕즉낙승(無慾卽樂勝 : 욕심을 버리면 쉽게 승리한다)' 이라는 경마계의 명언을 실감하고 있다.

심재우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