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프리뷰] 꽃피는봄이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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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최민식은 줄곧 인간이 지닌 양면성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배역을 맡아왔다. '해피 엔드'에서는 평범한 가장과 살인마를, '파이란'에서는 3류 건달과 애절한 사랑의 주인공을 동시에 연기했다.

2002년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탄 영화 '취화선'에선 예술가와 광인을 오갔고, 올 봄 같은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올드 보이'에선 '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사는' 인물에서 복수심에 불타는 냉혈한으로 변모했다.

최민식은 어수룩하고 모자란 듯한 표정으로 편안한 느낌을 안긴다. 그러다 세상의 끝으로 몰린, 미치기 일보직전의 인간으로 돌변해 관객을 몰입시킨다. 이게 바로 그의 특기다.

그런데 그가 이번에는 좀 다른 영화를 택했다. "'올드 보이'가 워낙 강렬한 영화였기 때문에 그 기억을 지우기 위해 정반대의 영화를 골랐다"는 그의 설명처럼 새 영화 '꽃피는 봄이 오면'은 시종일관 차분하다. 악기 소리가 자주 울려퍼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요란스러운 구석은 없다.

영화는 세상 살맛 잃은 트럼펫 연주가의 이야기다. 구청 주부교실에서 색소폰을 가르치는 자신을 마냥 한심스럽게 생각하는 현우. 교향악단 연주자 공모 오디션에서 또 미역국을 마신다. 그날 아침 밥상에는 진짜 미역국이 올랐었다. 자신이 무능력하다는 이유로 떠나보낸 여인은 갑자기 "오빠가 준 목걸이 팔아 술 마셨다 …결혼할 것 같다"고 말한다.

지갑 속에서 꼬깃꼬깃해진 강원도 도계중학교 관악부 지도교사 모집 광고를 펼친 주인공. 홀어머니(윤여정 분)를 서울에 남겨둔 채 떠난다. 그리고 숫자만으로도 변변한 관악단 하나 만들 수 없는 학생들을 모아 전국 경연대회를 준비한다. 그러면서 아버지의 반대로, 할머니의 죽음으로 관악부를 떠나려는 학생들을 감싸안는 따뜻한 선생님이 되기도 하고, "소화제 먹으면 눈병 안 걸린다"고 말하는 젊은 약사(장신영 분)에게 애틋한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영화는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그에게 어머니가 "너는 이제 시작이야"라고 말하는 대목을 거쳐 그렇게 겨울을 탄광촌에서 보낸 주인공이 꽃잎 날리는 봄날 도시로 다시 돌아온 모습을 비추며 끝난다.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에서 조연출 경험을 쌓은 류장하 감독은 도계중 관악부와 지도교사에 대한 TV 다큐멘터리를 보고 영화의 모티브를 얻었다고 한다. 전국대회에서 올해까지 11년 연속 우승한 탄광촌 관악부의 실화 위에 상처입은 연주가가 사랑과 희망을 되찾는 드라마를 얹은 것이다.

영화는 관악부와 지도교사의 열정을 드러내는 것과 한 개인이 성숙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 이 두 토끼를 다 잡지 못한 인상을 준다. 치밀하게 극적 요소를 깔아놓은 요즘 영화들의 매운 맛에 입맛이 길든 때문인지 싱거운 느낌도 든다. 하지만 세계적 배우가 된 최민식의 연기는 살아있다. 그는 "밥은 먹었어?"라는 두 마디 대사로도 관객을 미소짓게 만든다. 24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

이상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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