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 총선 재검표 빨리 끝내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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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16대 총선이 막내린 지 20여일이 지났건만 많은 사람들이 "아직 총선이 끝난 게 아니다" 고 말한다.

워낙 공방전이 치열했던 터라 적발된 선거사범이 많고 당선무효 소송도 잇따라 그 처리가 아직 변수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또 전례 없는 박빙의 승부로 당락이 엇갈린 곳이 많았던 점이 이번 총선의 특징 중 하나였다. 3표, 11표, 16표, 19표 등 1백표차 이내 선거구가 4곳이나 되고 1천표 이내는 모두 15곳이나 된다.

선거에서 당선과 낙선은 바로 천당과 지옥의 차이라고 한다. 정치 생명이 좌우되거나 경제적.정신적으로 치명적 타격을 입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러니 수만표를 놓고 다투는 선거에서 불과 몇십, 몇백표 차이로 낙선된 당사자는 발을 동동 구를 것이 틀림없다.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으로 재검표에 희망을 갖는 것도 인지상정(人之常情)일 것이다.

또한 근소한 차이로 당선된 후보도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재검표로 뒤집힌다면 보통 낭패가 아니기 때문이다. 상대 낙선 후보가 소송을 낸 경우 당선자들도 법원의 재검표가 끝날 때까지는 발 뻗고 잘 입장이 아닐 것이다.

제헌의회 이후 재검표로 국회의원 당락이 바뀐 경우는 모두 6건이다. 최근에는 92년 14대 총선 당시 민자당 김용채(金鎔采)후보에게 36표 차이로 패했던 임채정(林采正.당시 민주당)후보가 재검표를 통해 6개월 만에 금배지를 단 적이 있다. 전례들이 있으니 낙선자들이 줄줄이 당선무효 소송을 내는 현상이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이해할 만하다.

선거법상 총선의 당선.선거 무효소송은 30일 이내에 대법원에 제기하고 1백80일 이내에 처리하도록 돼있다. 이번 총선의 경우 이미 전국 8개 선거구에서 투표함 보전신청이 접수돼 법원의 재검표를 기다리는 상태다.

어느 소송이든 다 그렇겠지만 당락을 다투는 선거소송은 특별히 신속하게 매듭지어줘야 한다. 선거소송의 인지대가 일반 소송사건의 10배로 정해진 데는 바로 급행료의 의미도 포함돼 있다.

특히 당선무효 소송은 다른 다툼 없이 재검표만 요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냥 승복하기가 너무도 안타깝고 억울하니 다시 한번 표를 계산해달라는 뜻일 것이다. 15대 총선 당시 접수된 7건 중 재검표가 끝나자마자 5건이나 소를 취하해버린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므로 재판부가 기일을 지정하고 현지에 나가 한나절만 수고하면 되는, 법률적으로는 지극히 단순하고 간단한 사건인 셈이다.

선거소송은 대법관 3명씩으로 구성된 3개 재판부가 맡고 있다. 그러나 아직 기일 지정은 한건도 안됐으니 언제 모두 마무리될지 걱정이다. 재검표만이라도 개원 전 실시했으면 좋으련만 지금으로서는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국회 등원 한참 후 당선자가 바뀌는 것은 당사자에게도 득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여러가지 면에서 번거로움이나 혼란이 따를 수밖에 없으니 국가적 손실도 적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일반 상고사건이 워낙 많은데다 재판부별로 대법관 3명이 동시에 출장 일정을 맞추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또 대법관에 따라 구속기간 등에 쫓겨 시급히 처리해야 할 사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 사건은 당사자가 원고와 피고 둘뿐이고 이해관계도 주변인물로 한정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선거 소송은 당락이 엇갈린 후보자 2명만이 당사자가 아니란 점을 유념해야 한다.

해당 후보자들뿐만 아니라 그 지역 유권자 모두가 당사자고 넓게는 온 국민이 당사자일 수도 있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온 국민이 당사자인 사건을 최우선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데는 이론이 있을 수 없다.

새 천년을 맞아 대법원은 사법부 개혁 청사진을 발표했었다. 사법 서비스의 개선도 특히 강조했는데 선거소송부터 대법원이 솔선수범했으면 좋겠다.

예를 들어 토요일이건 일요일이건 서둘러 3개 재판부가 일제히 특별기일을 지정하는 등 재검표 작업을 서두른다면 백 마디의 지시보다 하급법원에 훌륭한 가르침이 되지 않을까. 사법부의 달라진 새 모습을 기대한다.

권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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