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나눔추진단장 맡은 연극배우 박정자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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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몇 장씩 쌓아 올린 군용 매트리스를 잇대어 만든 무대. 백열등 몇 개를 묶어 만든 간이 조명시설. 철모를 의자 삼아 깔고 앉은 군인 관객들. 연극배우 박정자(67·사진)씨가 1968년 여름날 강원도 철원의 한 군부대에서 올렸던 단막극 공연장 모습이다. 문화생활을 누릴 기회가 적은 군인들을 위해 기획한 ‘위문 공연’이었다.

베테랑 연극배우로 근사한 무대에 숱하게 섰지만 그때 공연은 지금도 각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다름 아니라 ‘문화를 통한 나눔’이라는 공연의 의미 때문이다.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무대였지만 제 눈엔 사랑스럽고 귀엽게만 보였어요. 문화를 접하기 어려운 이들을 위해 마련한 공연이라는 의미가 컸기 때문이지요. 공연을 통해 문화에서 소외된 이들에게 감동을 나눠 줄 수 있다는 점이 좋아서 더 신나게 연기했지요.”

이후 틈틈이 연극을 통한 나눔을 실천해왔다. 지난해부터는 ‘박정자’라는 이름 석자에 자동으로 붙는 ‘연극배우’라는 타이틀 외에 문화나눔추진단 단장이라는 직함까지 달고 활동 중이다.

문화나눔추진단은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소속으로, 교정시설이며 군부대, 산간 벽지와 같은 문화 사각지대를 찾아가 공연을 한다. 복권위원회가 복권 판매 수익금으로 마련한 복권기금으로 운영된다. 심사를 통해 선정된 약 130개의 문화·예술 관련 단체가 전국을 누빈다.

그는 “올해만 해도 나눔 공연을 1000번 넘게 했다”고 말했다. 6일부터 27일까지는 소외된 이웃을 위해 ‘희망나눔콘서트’를 연다. 가수 강산에와 어린이합창단을 비롯한 공연단이 서울 구로, 전남 해남 등 6곳을 돌며 무대를 꾸민다. 난치병 환자 가족을 초청해 함께 공연하는가 하면 지역주민이 동참하는 프로그램도 있다.

‘연극배우 박정자’는 널리 알려져 있지만 문화나눔추진단 단장이라는 직함의 박정자는 익숙하지 않은 게 사실이다. 46년째 무대에 서 온 그는 2007년엔 보관문화훈장을 받았고 지난해엔 예술원 회원으로 선출됐을 정도로 배우로서3의 입지가 확고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연극과 나눔은 같은 이름이라고 강조했다.

“나눔이란 게 어려운 일이 아니더라고요. 각자 잘 하는 일을 통해 나눔을 실천하면 되지요. 제 경우엔 그게 연극인 것이고요. 연극이 저를 숨쉬게 해줬으니 저도 뭔가 보답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공연 때마다 소년소녀 가장이나 장애아를 무료로 초청하는 시간을 마련해왔다. 터키와 파키스탄에서 지진이 났을 땐 공연 수익금을 성금으로 보내기도 했다. 그가 80세가 될 때까지 2년마다 무대에 올리겠다고 공언한 연극 ‘19 그리고 80’의 내년 공연도 ‘나눔’을 테마로 삼을 계획이다. 그가 특히 관심을 두는 일은 소외 계층의 어린이들에게 공연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문화나눔추진단 활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다.

“경제적으로 어렵다고 해서 마음까지 가난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성장기 아이들에게는 문화가 마음의 빈 자리를 채워줘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도 문화를 통한 나눔 활동이 더 활발해져야 해요.”

그는 결국 “남을 도움으로써 내가 얻는 기쁨이 더 크다”고도 강조했다. 사실 그도 나눔 활동을 통해 뜻밖의 행운을 만났다. 68년 군부대 위문 공연에서 만난 ‘빡빡머리 소위’와 사랑에 빠져 결혼한 것이다.

성우 출신다운 풍부한 목소리로 ‘나눈다’라는 단어를 또박또박 힘주어 발음한 그는 “‘나눈다’라는 말엔 아름다운 울림이 있다”며 “우리 모두가 이 아름다운 울림을 각자의 자리에서 확장시켜야 풍요로운 사회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저도 새해엔 무대를 통한 문화 나눔에 더 힘쓸 예정입니다. 제가 잘 하는 것으로 남을 도울 수 있다는 건 축복입니다.”

글=전수진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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