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노패스트15 [12] 계란으로 바위치기? … 광학필름으로 3M 아성 넘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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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1면

‘이노패스트 15’는 혁신(Innovative)을 통해 고성장(Fast-Growing)을 일궈내는 우량기업을 가리킵니다. ‘한국 대표기업’이라고 하기엔 아직 부족하지만 미래의 성장동력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는 중견·중소 기업들입니다. 중앙일보는 작지만 강한 15개 이노패스트 기업의 창업·성장 스토리를 통해 기업가 정신이 기업의 성장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조명할 예정입니다. 세계적 컨설팅 업체인 딜로이트의 컨설팅도 함께 소개합니다. 또 매년 이들 기업의 성과를 다시 취재해 성공과 실패의 원인도 분석해 나가겠습니다.

미래나노텍 김철영 사장이 충북 청원 오창과학단지에 있는 광학필름 생산라인에 섰다. 김 사장 앞으로 보이는 푸른 빛의 광학필름 롤은 다양한 크기로 가공돼 TV와 노트북, 모니터용 LCD(액정표시장치)를 만드는 데 쓰인다. [청원=프리랜서 김성태]

세계 시장을 독점하는 기업이 있다. 특허 기술 덕분이다. 시장 규모도 크다. 당연히 이익도 많이 낸다. 직원은 수만 명, 제품군은 8만 개쯤 되는 글로벌 대기업이다. 좀처럼 움직일 것 같지 않은 ‘바위’다.

막 창업한 회사가 있다. 서울 봉천동 창업보육센터에 둥지를 틀었다. 사장 포함해 직원 8명. 사장이 전 직장에서 받은 퇴직금과 적금을 털고 장인 돈까지 빌려 3억원으로 차린 회사다. 병아리도 아직 못 된 ‘계란’이다. 그런데 이 회사의 사업 아이템, 글로벌 기업이 세계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바로 그 제품으로 정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글로벌 대기업은 미국의 3M, 신생 회사는 미래나노텍, 그 제품은 프리즘필름이다. 2002년 김철영(45) 사장이 미래나노텍을 창업할 당시 3M은 세계 프리즘필름 시장을 독점하고 있었다. 프리즘필름은 LCD 패널에 들어가는 부품. 화면의 밝기를 유지하면서 소비전력을 줄이는 역할을 한다.

3M에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이 도전장을 냈다가 좌절을 맛본 터였다. 3M의 기술 특허는 필름 표면을 삼각형 모양의 돌기로 만든 것이었다. 그런데 이 특허를 피하기 위해 삼각형 모양을 포기하면 빛을 제대로 모으지 못했다. 모두 불가능을 얘기할 때 김 사장은 “그래서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시장 크지, 수요 늘지, 돈이 확실히 되겠더라고요. 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3M 특허는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든든한 백이 되겠다 생각했죠. 그 장벽이 나도 막았지만 다른 경쟁자도 막아줄 수 있거든요.”

그는 카메라 렌즈의 원리에 착안해 돌기를 반구형으로 만들었다. 삼성SDI에 근무하면서 광학 분야를 다룬 경험을 살렸다. 3M 특허를 피하면서 프리즘 역할도 해냈다. 절반의 성공이었다. 문제는 가격이었다. 3M보다 더 싼값에 내놓지 않으면 팔리지 않을 게 뻔했다.

그래서 ‘소프트 몰드 공법’을 개발했다. 필름에 패턴을 새겨 넣을 때 금속이 아닌 플라스틱 재질을 썼다. 금속 몰드보다 원가를 50분의 1로 낮출 수 있었다. 기술이 완비되자 이번엔 제품을 생산할 길이 막연했다. 여러 기업을 찾아 다닌 끝에 LG전자와 기술제휴를 할 수 있었다. LG의 생산시설로 제품을 만들어 바로 LG디스플레이에 납품할 수 있어 일거양득이었다. 창업 2년 만이었다.

이듬해에는 빛을 분산하는 확산 필름과 모아주는 프리즘필름을 합친 ‘복합 필름’을 개발했다. 세계 최초였다. 주문이 밀려들었다. 자체 공장도 짓고, 삼성전자에 납품도 시작했다. 매출이 153억원(2005년)에서 629억원(2006년)으로 1년 만에 네 배로 뛰었다. 주문량은 폭주하는데 사람이 모자랐다. 1년간 직원이 100명이나 새로 들어왔다. 그러나 달콤함도 잠시, 역시 문제가 생겨났다.

“사람을 뽑고 교육할 틈도 없이 현장에 배치했어요. 생산관리나 인력관리가 될 수가 없었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들의 시장 진입을 막아주던 3M 특허가 만료됐다. 그동안 실패했던 대기업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시장에 제품을 쏟아냈다. 미래나노텍을 견제하기 위한 ‘백지 견적’까지 나왔다. 미래나노텍보다 무조건 1원이라도 싸게 납품하겠다는 회사가 줄을 이었다. 2007년 영업이익은 전해보다 63%나 줄어들었다.

본격적인 어려움은 상장 이후에 찾아왔다. 2007년 10월 공모가 3만7000원에 상장한 주식은 1년 만에 9분의 1 수준(4100원)으로 떨어졌다. 밤낮으로 투자자들의 협박 전화에 시달려야 했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위기 의식으로 무장했다. “우리는 아이디어와 기술밖에 없다. 다시 제품으로 승부하자.”

보호필름을 덧붙이지 않아도 되는 ‘복합 멀티 필름’을 내놓았다. TV와 노트북·모니터가 슬림화 경쟁을 하던 터라 반응이 좋았다. 서너 장씩 쓰던 필름을 한 장으로 줄일 수 있어 원가도 절감하고 두께도 얇게 만들 수 있었다. LED TV 출시에 맞춰 열에 잘 견디는 필름을 내놓아 올해 대박을 냈다. 거래처도 해외로 넓혔다. 일본 샤프, 대만 AUO·CMO, 중국 BOE 등 세계 메이저 업체들을 뚫었다.

창업 7년째인 올해 예상 매출액은 2700억원. 연평균 복합성장률(CAGR) 231%로, 제조업에서는 경이로운 기록이다. 딜로이트와 중앙일보가 선정한 이노패스트 15개 기업 중에서도 단연 최고다. 프리즘필름에선 올 상반기 세계 시장 점유율 2위(18.4%)에 올랐다. 100%였던 3M의 점유율은 22.4%로 쪼그라들었다. 김 사장은 “내년에는 3M을 제치고 세계 1위(30%)에 오를 수 있다”고 자신했다. LCD 패널의 대형화, LED 같은 신소재 개발, 터치 패널용 소재 등 일찌감치 준비해 놓은 ‘병기’들이 있기에 나오는 자신감이다.

또 다른 난공불락 요새에도 도전장을 내놓은 상태다. 이번에도 3M이 세계 시장을 주름잡고 있는 품목이다.

혁신적 제품을 기반으로 김 사장은 과감한 목표를 내걸었다. ‘내년 매출 5000억원, 2012년 1조원’. 2년 만에 매출을 ‘더블’로 만들어 조 단위로 올려놓겠다는 거다. 창업한 지 불과 10년 만의 도전이다.

특별취재팀=금융증권팀 김준현 차장, 김원배·김영훈·조민근·박현영·한애란 기자, 사진=프리랜서 김성태

이런 점은 보완하세요
2개 이상 제품 개발과 마케팅 동시에 추진하는 민첩성 필요

‘Dog Year’. PC 비즈니스를 개의 연령에 비유해 1년이 2개월 정도에 해당한다는 의미로 쓰이는 말이다. 오늘날과 같이 급변하는 경영 환경에서는 결국 그 규모에 관계 없이 민첩한 기업만이 생존할 수 있음을 뜻하기도 한다. 민첩한 기업은 빠르게 변화하는 시장에 맞춰 대량생산의 한계를 넘어선다. 시장을 세분화해 종전에 비해 보다 작은 단위로 주문생산이 가능하며 신속한 모델 변경과 제품만이 아닌 정보의 판매를 앞세워 경쟁하는 회사다.

기민한 기업의 생존 확률이 높아진 것은 제품 가치의 중심이 제조에서 서비스와 정보로 이전하는 추세와 직결돼 있다. 생산과정에서 제조의 역할, 제품과 서비스의 위치에 대한 개념이 변화하고 있다. 따라서 낡은 패러다임에 젖은 기업은 변화하는 흐름에 뒤떨어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앞으로 이 회사의 기술전략은 제품보다는 시장에 대한 대응능력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이는 결국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처하는 능력을 갖춰야 함을 의미한다. 민첩한 기업은 2개 이상의 마케팅 및 제품개발 전략을 동시에 추진할 수 있어야 한다. 새로운 고객 기회를 미리 창출하고 이를 통해 미처 예측하지 못했던 기회에 신속히 대응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이 회사가 비교적 탄탄대로를 걸어올 수 있었던 것은 기술기업임에도 기술에 대한 맹목적 집착이 덜했기 때문이다. 첨단기술 개발에 매달리기보다 시장에서 팔릴 수 있는 기술을 적기에 개발하거나 확보한 것이 주효했다. 요는 시장 성숙도에 맞춰 적절히 대응하는 ‘타이밍 경영’이 성공의 방정식이었던 셈이다. 향후 상품의 경쟁력을 보다 강화하기 위해서는 첨단 기술을 찾아내 이를 잘 짜맞춰 상품화하는 ‘하이테크 패키징(packaging)’이 필수적이다.

이런 관점에서 애플의 최대 히트상품 중 하나인 아이팟의 성공사례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아이팟 기능의 핵심인 음악 파일이나 메모리 기술은 원래 애플이 개발한 것이 아니었다. 필요한 기술과 이 기술을 제공할 곳을 찾아 디자인으로 포장하고 여기에 음악 다운로드 서비스인 ‘아이튠스’를 결합해 성공을 일군 것이다.

이 회사가 가진 핵심 경쟁력 중 하나는 CEO의 독특한 관점과 시각이다. 시장의 변화와 발전 방향을 읽고 신속하게 대응하는 통찰력은 조직 전체가 공유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 같은 CEO의 경쟁력을 대량으로 ‘복제’해 전 조직원이 공유할 수 있도록 하는 혁신시스템을 구축해야 할 것이다. 최초의 PC가 개발된 것은 개발자의 개인적 필요를 충족시키려는 욕구에서 비롯됐다.

핵심 인재를 유지하기 위한 기본 원칙은 조직원에게 성장의 기회를 빠짐없이 제공하는 데 있다. 자기 계발을 통해 성장할 수 있다는 비전을 심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아울러 핵심 인재를 발굴해 별도의 프로그램으로 관리하되 대체 가능한 인재 풀을 확보함으로써 유사시 경영 공백 없이 즉각적인 업무대행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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