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총선보기] 당신들이 맹주면 유권자는 卒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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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16대 총선 후보등록을 받으니 전국적으로 1천여명의 정치인 내지 정치입문 희망자가 몰려들었다고 한다. 바야흐로 처처에서 '내로라' 하고 흰소리를 있는 대로 쳐가며 큰 굿 작은 굿 하여 갖은 굿을 줄잡아 열두 거리씩은 벌일 참이다.

무릇 스스로 남들의 대표 노릇을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 가운데는 여러모로 난사람이나 된사람이 없지 않다. 그러므로 살아도 하필 인물만 흔해터진 인물공화국에 살아서, 다른 복은 박복해도 인복 하나는 톡톡히 보며 살겠구나 싶어 여간 다행이 아니라고 여긴 적도 없었던 것이 아니다.

하지만 자기가 이미 큰 인물이 됐다거나 장차 큰인물이 되겠노라고 떠드는 것은 듣기가 거북한 일이다. 게다가 한 술 더 떠 마치 중세 유럽의 영주(領主)로 착각하고 있는 듯한 꼴은 거북한 정도를 지나 가위 꼴불견이 아닐 수 없다.

도대체 언제 어디서 누구와 어떤 회맹을 했기에 감히 어느 지역의 맹주를 함부로 자처한단 말인가. 지금은 군웅할거의 춘추오패(春秋五覇)시대가 아니다. 군웅할거는 고사하고 군졸횡행(群卒橫行)의 시대라는 말이나 안 들었으면 하고 각자가 삼가는 것이 마땅한 때일 것이다.

임금은 백성으로 하늘을 삼고 백성은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다고 일러온 말은, 봉건시대 이래 오늘날의 위정자에 이르기까지 만고불변의 정치적 지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인은 국민을 하늘로 알고 국민은 먹고 사는 일을 하늘로 안다는 말일진대 과연 그 누가 이를 무슨 나름으로 부인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있다. 이를테면 나라의 권력은 국민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맹주에게 있으며, 또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게 아니라 맹주로부터 나온다고 믿는 이들이 그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유감스럽게도 큰일을 할 큰 인물은커녕 졸자를 면하기가 장히 어려운 사람들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대개 두 얼굴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데 있다.

그들은 거의가 자기의 선거구에 와서 하는 말과 남의 선거구에 가서 하는 말이 전혀 다르다. 자기의 선거구에 와서 하는 말은 으레 자기가 큰일을 할 큰일꾼이요, 큰머슴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남의 선거구에 가면 자기의 선거구뿐 아니라 그 선거구가 속한 도(道)까지도 자기가 바로 터줏대감이라고 사뭇 호령을 해댄다.

터줏대감은 터전이 넓은 대지주를 달리 이르는 말이므로 터줏대감들의 텃밭은 바로 터줏대감들의 식읍(食邑)이거나 식민지인 셈이다. 따라서 텃밭에 사는 주민은 아랫것에 가까운 소작인을 달리 이르는 말에 불과하니 큰일꾼과 큰머슴은 터줏대감이 아닌 주민인 셈이며, 터줏대감을 자처하는 인물이야말로 텃밭의 주민을 이리왈 저리왈 하고 부려먹는 권력자인 셈이다.

자칭 맹주들은 오늘도 전국민을 경기니 충청이니 호남이니 티케이니 피케이니 하며 다섯 패로 나누기 위해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더욱 거세게 바람잡이 노릇을 할 것이다.

바람에 휘말리지 않고, 부화뇌동하는 무지렁이와 달리 줏대있게 사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큰일하는 큰 인물임을 모르는 탓이다. 큰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기대한다. 이번에는 전국을 다섯 패로 쪼개어 '5패' 시대를 꿈꾸는 맹주들부터 우선 청산하고 볼 것을.

이문구 <소설가.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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