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수류탄에서 원자로까지 (61)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61.일하면서 배우자

내가 한국전력 이사회에 제출한 경수로(輕水爐)핵연료 국산화 계획안이 막상 이사회에서 통과되자 나는 솔직히 걱정이 앞섰다.

내가 새로 계획안을 작성하기 전 이미 한전은 1987년 말까지 이 사업을 끝내기로 사업기간을 정해놓은 상태였다. 그러니 시간이 촉박했다. 불과 4년5개월 안에 사업을 완료해야 했다.

나는 83년 7월초 핵연료주식회사 사장에 임명돼 중간에 이 사업을 떠맡았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사업기간을 변경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당시 우리 과학기술자들이 경수로 핵연료 설계기술을 익히는 데만 무려 3년이 걸렸다.

더욱이 그 무렵 우리 과학기술자 중에서 경수로 핵연료를 설계할 수 있는 인력은 국내외를 망라해 고작 3~4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경수로 핵연료를 국산화하려면 무려 1백50명 가량의 핵연료 설계 인력이 필요했다. 또 이들을 일정기간 훈련시켜야 했으므로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이들에 대한 훈련비도 자그마치 1백50억원이나 있어야 했다. 1인당 훈련비가 약 1억원 정도 드는 셈이었다. 그렇지만 당시 훈련비는 전혀 없었고 핵연료 설계비도 제대로 책정돼 있지 않았다. 한마디로 시간.인력.예산 등이 모두 턱없이 부족한 상태에서 이 사업을 시작해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하도 답답해 이틀간 아예 출근도 하지 않은 채 집에 틀어박혀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다. 무리수를 두는 수밖에 없었다. 비록 적은 인원이지만 해외에서 활약하는 우리 과학기술자들을 국내로 불러들여 이들이 중심이 돼 외국의 원자력 회사와 '공동설계' 를 하기로 결심했다.

내가 구상한 공동설계란 대략 이런 것이었다. 핵연료 설계는 우리와 손잡을 외국 회사와 우리 과학기술진이 각각 반반씩 수행한다.

단, 책임은 우리한테 설계기술을 제공해 줄 외국 회사가 진다. 또 설계훈련은 설계과정에서 받기로 하고 별도의 훈련기간 없이 곧바로 설계에 들어간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공동설계이기 때문에 훈련비는 한 푼도 줄 수 없다는 것 등이 바로 그것이었다.

한마디로 '일하면서 배우자' 는 것이었다. 외국의 원자력 전문가들이 보면 전혀 이해가 안 가는 억지 논리였다. 그래도 나로서는 이 방법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공동설계 개념을 도입할 경우 일단 핵연료 설계기술을 익히는 데 소요되는 3년간의 훈련기간이 필요 없게 되고 설계 훈련비도 일체 지불하지 않아도 돼 시간과 경비를 엄청나게 절약할 수 있었다. 또 설계 인력을 반으로 줄일 수 있어 인력부담을 상당히 줄일 수 있었다.

나는 다음날 출근하자마자 임창생(林昌生.60.전 한국원자력연구소장)대덕(大德)공학센터 핵연료개발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林박사는 우리나라에서 경수로 핵연료 설계분야의 최고 전문가였다.

그는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1회 졸업생으로 미 매사추세츠 공과대(MIT)에서 핵공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은후 곧바로 미 웨스팅하우스사(社)에서 핵연료 설계팀장으로 7년간 경수로 핵연료를 설계한 경험이 있었다.

나는 林박사에게 경수로 핵연료 설계책임을 맡길 생각이었다. 당시 나는 대덕공학센터장 겸 핵연료주식회사 사장을 겸하고 있었으므로 경수로 핵연료 국산화 사업에 두 군데의 인력을 모두 동원할 계획이었다.

나는 林박사에게 "경수로 핵연료 국산화사업은 공동설계로 가야겠다" 고 말했다. 林박사는 의아스러운듯 "그게 무슨 말씀이냐" 고 물었다. 전문가인 그로서도 처음 들어보는 용어인지라 얼른 이해가 안 가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에게 먼저 공동설계의 개념에 대해 설명해 줄 생각이었다. 그가 이 개념을 확실히 알아야 앞으로 차질없이 사업을 추진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한필순 전원자력연구소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