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커스] 벤처문화의 역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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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우리나라의 벤처 열풍은 아마 전세계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폭발적이다. 벤처기업가의 한 사람으로서 국제통화기금(IMF)체제의 어려움을 겪어내면서 오히려 전화위복의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에 대해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이와 같은 벤처 열풍은 급작스런 신흥 젊은 부자들을 탄생시키고 많은 젊은이를 벤처로 내몰아 기존 산업의 공동화를 부추기고 있다는 일부의 우려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벤처문화는 거꾸로 전 사회로 급속히 파급돼 지난 수십년간의 상식이 통하지 않던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기폭제가 될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벤처문화란 한 마디로 단언하기 힘들다. 다만 필자의 주관적 판단을 빌리자면 우선 원칙을 존중하고 공개적이어서 투명한 것을 좋아하고 서로의 장점을 높이 사주고 자신의 역량을 나누어주는 나눔의 문화라고 생각한다.

벤처기업은 항상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제한적임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나 혼자 다 할 수 없음을 인정하기 때문에 자신이 할 수 없는, 즉 핵심역량이 아닌 것은 가장 잘 할 수 있는 남으로부터 구한다. 이것이 벤처 성공의 지름길이요, 기본 정신이다.

실리콘 밸리에서는 1~2년 안에 회사를 옮기지 못하면 무능력하다고 여길 정도로 이직(移職)이 빈번하다. 다양한 전문가들이 자신의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기업에 기술을 제공하는 것이 보통이다.

직장이 아니라 직업을 선택하고 관리한다. 이들은 이직 또는 창업을 통해 자신의 핵심역량을 관리하고 이러한 전문가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실리콘밸리라는 생태계는 보다 나은 자원을 풍부하게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비록 일시적으로 인재를 빼앗기는 기업은 고통스러울지 몰라도 결과적으로는 그 기업에도 이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나눔과 프로정신이 지금의 실리콘밸리를 있게 한 원동력이었음은 두말 할 것도 없다.

이러한 벤처문화는 개개인들에게 철저한 자기관리를 요구한다. 여러 기업을 통해 자신의 업적이 평가받지 못하면 스카우트 대상에서 제외될 것은 뻔한 이치다.

따라서 자신의 업적관리를 위해 현재 몸담고 있는 회사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 과거 우리네처럼 회사를 위해 일한다는 미명 아래 윗사람 눈치나 보고 무위도식하는 일은 이제 사라질 수밖에 없다.

또한 벤처문화는 자신의 핵심 역량을 제외하면 다른 이에게 구해야 하는 문화다. 따라서 자신의 성장을 도모할 최고의 파트너들과의 관계를 무엇보다 중시한다.

좋은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신뢰를 위한 원칙과 투명성이 절실히 요구된다. 벤처기업들의 구조를 들여다보면 여러 계층의 전문가나 투자회사들이 주주로 참여하기 때문에 경영에 있어 이와 같은 덕목은 가위 절대적이다.

과거의 조직처럼 능력과는 무관하게 내 말을 잘 듣는 사람 측근 만들기와 같은 방법으로는 프로다운 성과를 만들기 어렵다.

축구시합을 하는데 실력과는 상관없이 내 후배, 내 가족을 내세워 프로팀을 만드는 멍청한 구단주는 없을 것이다.

벤처도 최고의 선수가 모이면 모일수록 승리 가능성이 큰 축구단과 같은 조직이기 때문에 그들과의 관계에 따라 벤처기업가 또는 벤처 종사자들의 능력을 평가받게 된다. 따라서 21세기 덕목 중 도덕성이 빠지지 않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사회 곳곳에서는 효율성과 투명성과는 거리가 먼 끈적끈적한 인맥으로 얽히고 설킨 모순덩어리들이 인터넷과 디지털이 주도하는 투명한 세상의 빛을 받아 맥을 못추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국회의원이 국민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보스를 위해 일하는 상식밖의 일이 그렇고, 회사 총 주식의 몇%밖에 없는 사람을 오너라고 부르는 난센스도 그렇다. 제약회사와 병원의 검은 거래도 그렇다. 아마도 우리 사회 전체가 오랜 시간 일종의 관행이라는 미명 아래 얽혀온 타래가 끊어지는 아픔을 여기저기서 느끼게 될 것이다.

벤처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 사회는 한동안 많은 문제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묻지마 투자자들의 수많은 실패를 보게 될 것이고 무늬만 벤처인 기업들의 도태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어찌됐든 우리 사회는 이제 상식이 통하고 신의가 가장 중요한 자산이 되는 사회로 급속히 변해갈 것이고 이 역풍의 주역은 역시 벤처가 아닌가 싶다.

전하진 <한글과컴퓨터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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