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타 폴라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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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호 33면

과거 나라를 잃었던 설움이 깊어서일까. 폴란드는 조상이 몇 대(代) 전에 떠났건 폴란드 혈통의 해외 거주자는 모두 자국민으로 친다. 국권상실기에 폴란드를 떠나 프랑스에서 활동하다 세상을 떠난 쇼팽과 퀴리 부인도 당연히 폴란드 국민으로 여긴다. 어떤 나라에 살든, 어느 국적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채인택의 미시 세계사

폴란드는 20세기 들어 독립을 찾았지만 주변 나라에 수많은 폴란드계를 소수민족으로 남겼다. 18세기 후반∼20세기 초의 국권상실기부터 제2차 세계대전 시기를 지나 공산정권 통치기에 이르기까지 폭정과 가난으로 서유럽이나 미주로 옮겨간 사람도 수두룩하다. 현재 폴란드 인구가 3800여만 명인데, 미국의 1000만 명을 비롯해 해외거주 폴란드계는 200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유대인 국외이주’를 뜻하는 디아스포라에서 딴 ‘폴란드인 디아스포라’라는 용어가 있을 정도다.

문제는 폴란드가 외국 국적의 폴란드계를 심정적으로는 물론 법률적으로도 자국민으로 대접했다는 사실이다. 권리는 물론 의무도 지웠다. 입국은 외국 여권으로 해도 출국은 폴란드 여권을 만들어서 하도록 했다. 외국 국적자라도 젊은 남자라면 군대에 징집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외국 국적의 폴란드계를 이중국적 취득자로 간주했다. 그럴 경우 폴란드에서 외국인으로서 보호받을 수 없게 된다. 예로 폴란드계 미국인이 경찰에 잡혀가도 미국 영사가 접촉할 수 없었다. 이는 제네바 협정 제4조에 따른 ‘지배적 국적 규칙’ 때문이다. “한 국가는 다른 나라 국적을 함께 보유하고 있는 자국 국적자에게 다른 나라 국적 보유에 따른 어떠한 외교적 보호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이 때문에 미국은 폴란드계 자국민이 봉변당할 것을 막고자 1972년 별도 영사협정을 맺었다. 폴란드 비자를 받은 미국인에겐 이 원칙을 적용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받아냈다. 하지만 공산권이 몰락한 91년 폴란드 정부가 미국인에게 무비자 입국을 허용하면서 이 조항은 효력을 잃었다. 그래서 법대로 하면 폴란드를 방문한 외국 국적의 폴란드계는 출국 시 폴란드 여권을 발급받아 나가야 하는 등의 고약한 문제가 생겼다. 이른바 ‘패스포트 트랩’이다. 좋은 의도로 출발한 무비자가 시행과정에서 악재가 된 것이다.

이는 이중국적을 범죄시하는 나라에 사는 폴란드계 이민자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 특히 이웃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옛 소련권 거주자들이 대표적이다. 그래서 폴란드 정부는 원칙을 양보해 지난해 3월부터 ‘카르타 폴라카(폴란드 카드)’라는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폴란드계가 외국 국적을 유지하면서도 폴란드에서 내국인처럼 살게 해주는 카드다. 비자 없이 거주할 수 있음은 물론 직장도 다닐 수 있고 회사를 차릴 수도 있다. 학교에 다닐 경우 외국인에게 주는 장학금도 받을 수 있다. 다만 국민이 아니니 선거권은 없다. 주로 미주에 살고 있는 인재를 흡수하기 위해 복수국적 허용을 추진 중인 우리도 도입할 만한 제도라는 생각이다. 중앙아시아와 일본·중국 등에 수많은 한국계가 다른 나라 국적으로 살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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