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수류탄에서 원자로까지(4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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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41. 불꺼진 연구실

1982년 3월, 나는 12년 가까이 몸담아 왔던 국방과학연구소(ADD)를 떠나 대덕(大德)공학센터장에 취임했다. 새로운 일 터인지라 나름대로의 포부와 기대도 컸었다.

그러나 막상 부임해 보니 예상과는 달리 분위기가 축 가라앉아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 사망이후 대량감원 바람이 불던 ADD 보다 상황은 훨씬 좋지 않았다.

통폐합 후유증이 생각보다 큰 탓이었다. 대덕공학센터의 전신은 한국핵연료개발공단이었다. 이곳은 朴대통령 시절 어느 연구기관 보다 가장 대접을 받던 곳 중의 하나였다. 그럼에도 그런 흔적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핵연료개발공단이 한국원자력연구소와 통합, 한국에너지연구소로 바뀌면서 대덕 분소(分所)로 전락된 게 연구원들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린 게 분명했다.

예산도 대폭 삭감돼 막대한 경비를 들여 완공한 핵연료 가공 공장과 정련(精鍊)공장 등을 가동할 운영비조차 없었다. 공장은 완전히 녹슬 판이었다.

그러니 단돈 1천만원짜리라도 신규사업을 벌인다는 것은 아예 생각도 못했다. 상당수 핵심 인력은 이미 연구소를 떠난 상태였다. 남아 있는 연구원들도 연구는 완전히 뒷전으로 미룬 채 틈만 나면 떠날 생각만 하고 있었다.

오후 5시만 되면 어김없이 퇴근했다. '불꺼진 연구실' 을 바라보는 내 심정은 착잡했다. 넓디넓은 20만평의 부지가 더욱 썰렁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나의 운전기사가 들려준 말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이 기사는 전임 대덕공학센터장이었던 이한주(李漢周.70.연세대 화공생명공학부 특임교수)박사의 운전기사이기도 했다.

이 친구 말에 따르면 李박사가 본소인 에너지연구소에 갈 때는 정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워놓고 아예 걸어서 들어갔다고 한다. 에너지연구소측에서 '왜 센터장이 전용차를 타고 다니냐' 며 시비를 걸곤 했다는 것이다.

명색이 대덕공학센터장이면 에너지연구소 부소장이 아닌가. 그런데도 에너지연구소측에서는 마치 대덕공학센터가 에너지연구소에 더부살이를 하는 것으로 취급, 엄청나게 괄시했다는 것이다. 간부회의에서도 으례 李박사만 집중공격의 대상이 되곤 했었다는 것이다.

비단 에너지연구소 뿐만이 아니었다. 과학기술처나 한국전력에서도 이같은 홀대는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李박사가 찾아가면 언제나 따돌리곤 했다는 것이다. 요즘말로 '왕따' 를 시킨 셈이다.

李박사는 정말 어처구니 없이 당하는 설움 때문에 차 안에서 혼자 숱하게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결국 李박사는 참다 못해 연세대 공대 학장으로 자리를 옮기고 말았다.

나는 李박사가 왜 이같은 설움을 당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대덕공학센터는 과거 미국측으로부터 핵 개발의 의혹을 받은 기관이었다. 그런지라 새로 집권한 신군부가 미국측을 의식해 이 기관의 존재 자체를 매우 껄끄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역할을 제한하고 기구와 예산을 대폭 축소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눈치 빠른 사람들이 李박사를 완전히 무시한 것이었다. 만약 내가 이같은 실상을 알았다면 나 역시 李박사 후임으로 대덕공학센터장에 임명되는 것을 당연히 꺼려했을지 모른다.

ADD에서도 죽도록 일만 했는데 기껏 옮긴 곳이 이처럼 힘없고 무시당하는 기관일 줄이야 미처 예상치 못했다.

한마디로 모든 게 최악이었다. 나는 부임 다음날부터 전임자가 겪었던 수모를 실감하기 시작했다. 부임 인사차 과기처와 한국전력에 갔더니 만나는 사람마다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인사를 해도 건성으로 받았다.

나는 속으로 당황했다. '李박사가 차 안에서 숱하게 눈물을 흘렸다' 는 말이 점점 마음에 와닿기 시작했다.

과기처와 한전은 대덕공학센터의 '돈줄' 이었다. 과기처는 예산 배정권을 쥐고 있었고 한전은 연구 용역비를 제공하는 기관이었다. 그러니 불쾌해도 전혀 내색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급기야 두 기관의 관계자들 입에서 내가 듣기 거북스런 말이 쏟아져 나왔다.

글=한필순 전 원자력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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