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포커스] 돌아온 사르트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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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20세기 프랑스 지성사에 한 획을 그었던 장 폴 사르트르가 타계한 지 올해로 20년이다.

죽은 사르트르가 다시 살아 돌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연초부터 프랑스 출판계가 요란하다.

평전과 전기를 포함해 올 들어 이미 네 종의 책이 나왔고 다음달 초 다섯번째 책이 20주기(周忌)용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5만명의 애도 인파에 둘러싸여 파리 몽파르나스 묘지에 묻힌 지 꼭 스무해가 되는 오는 4월까지 10여종의 책이 더 나올 것으로 프랑스 출판계는 내다보고 있다.

사르트르 20주기 기념 신작들 가운데 요즘 프랑스에서 단연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은 베르나르 앙리 레비가 쓴 '사르트르의 세기(世紀)' (그라세 刊)다.

6백46쪽 분량의 이 책에서 프랑스 신철학의 기수로 유명한 앙리 레비는 사르트르에 대해 가차없는 재평가를 시도하고 있다.

"어떻게 자유인이면서 동시에 전체주의적 지식인일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한 시도" 라는 것이 그 자신의 설명이지만 사르트르가 남긴 숱한 저작들에 대한 새로운 책읽기를 통해 '사르트르 신화' 를 깬다는 의도가 다분히 엿보인다.

20세기의 스탕달이면서 동시에 스피노자이기를 원했지만 사르트르는 결국 그 중간 어디쯤 머물다 갔다고 앙리 레비는 말한다.

철학과 문학, 정치와 저널리즘, 연극과 영화를 자유자재로 넘나든 전천후 지식인이긴 했어도 영웅은 아니었다는 자리매김이 냉정하다.

'구토' 와 '존재와 무' 를 통해 인간존재의 부조리를 고발한 사르트르와 소련.쿠바의 공산주의.전체주의, 체 게바라의 혁명적 테러리즘에 경사(傾斜)된 또다른 사르트르의 간극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면 사르트르 또한 결점과 자기모순을 지닌 실수투성이의 인간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것이 앙리 레비의 평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르트르를 빼놓고 20세기 프랑스 지성사를 말할 수 없는 것은 '자유와 반항' 의 정신에 기초한 철저한 '앙가주망' (현실참여)의 자세 때문이라고 그는 지적한다.

땅에 발을 딛지 않고 허공에 뜬 지식인은 참 지식인이 아니라는 프랑스적 전제가 깔려 있다.

사르트르의 현실참여적 이미지는 한 장의 빛바랜 흑백사진에 연판(鉛版)처럼 각인돼 있다.

1968년 5월 학생사태 당시 파리 근교 불로뉴 비양쿠르에 있는 르노자동차 공장에 모인 수많은 노동자들 앞에서 확성기를 손에 든 63세 노인의 구부정한 모습을 담은 사진이다.

교실과 카페의 형이상학을 거리로, 철학으로 해방시킴으로써 사르트르는 프랑스 지식인의 현실참여적 전통의 전형을 보여줬다.

공천 부적격자를 선별, 명단을 만들어 발표한 총선시민연대의 획기적 현실참여 행보를 지켜보면서 사르트르를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은 그것이 지식인의 진정한 '앙가주망' 에서 비롯된 것이기를 바라는 소망 때문이다.

총선연대의 거사 그 자체는 우리의 일탈된 정치문화를 바로잡는 혁명적 기폭제가 될 수도 있는 '쾌거' 다.

배경을 놓고 자유와 반항보다 결탁과 음모에 근거한 '현실조작' 이라는 투의 주장도 일부에서는 나오고 있다.

비판하고 발표하는 것은 시대를 떠나 지식인의 몫이다.

설사 그것이 자신에게 화살이 돼 돌아온다 하더라도 자신의 논리로 자기 목소리 내기를 마다하지 않을 때 우리는 그를 진정한 지식인이라고 부를 것이다.

말하자면 사르트르가 그랬다.

총선연대에 대한 일각의 비판은 참 지식인이라면 감수해야 할 부메랑의 화살이라고 믿고 싶다.

배명복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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