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벤처단지의 성공조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온 나라가 벤처기업 열기에 휩싸여 있는 듯하다. 이 벤처 열기는 엄연한 세계적인 기술과 사회의 실제 흐름이며 한국도 그 예외가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오늘의 이런 벤처 열풍의 배경과 이를 통해 이 나라의 경제.과학기술.사회.금융.노동의 바람직한 미래상을 찾는 것이다.

과연 벤처기업 활성화가 우리 사회의 경제.정치.사회구조.대외경쟁력 등의 문제를 풀기 위해 우리의 주도적 비전에서 도출된 결론이며 일관성 있게 하이테크 신생기업 중심으로 추진되는 국가적 정책인가 하고 물어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필자는 우리나라의 연구소들이 밀집돼 있는 대덕 연구단지에 하나 둘씩 자리잡기 시작한 벤처기업의 수가 최근 급증해 이미 3백개를 넘어서서 서울의 테헤란밸리 다음으로 큰 벤처단지(TST힐)가 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물론 IMF한파와 기업.연구소의 구조조정으로 인한 목조르는 듯한 냉랭한 분위기, 옆에서 벤처로 돈 번 사람 소문에 의한 부추겨짐, 벤처기업 지원 건수에 집착하는 전시행정심리, 선심정치 PR, 증권시장에서의 무분별한 투자가들, 지원은 우선 받고 보자는 갈급한 기업들의 상황, 이런 것들이 오늘의 벤처 붐을 몰고온 주역임을 부인하기는 어렵고, 연구단지 창업도 그 배경은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그러나 이 TST힐의 반역(?)에 필자가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이유는 그것이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연구기관, 이공계 대학, 경쟁력 있는 정상적인 하이테크 벤처기업과 이를 지원하는 정부정책의 모델을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우리 사회가 지금부터 갈급히 바라는 것은 탁월한 기술을 무기로 가진 뒤에 모험정신과 경영기술까지 갖춘 탄탄한 신생기업들의 지속적인 탄생이며, 이것이 TST힐에서 확실히 보여지길 바란다.

정부의 일시적인 지원금.세제혜택이나 기관의 저렴한 공간대여료가 사업경쟁력의 주원천인 기업이나, 이들을 지원하는 정부나 지자체.각 기관들은 별로 장기적 비전이 없다.

성공하는 벤처기업의 3대 요건인 핵심기술.인프라.모험(창업)정신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검증된 핵심기술도 없이 벤처기업 간판을 화려하게 달고 있는 기업체들이 대부분인 우리의 현실을 보면서, 적어도 TST힐의 '반역자' 들 만큼은 기술의 탁월성과 확실한 상품화 시나리오로 세계시장을 향해 나아가는 하이테크 벤처기업의 모델이 돼주기를 바란다.

둘째, 우리나라의 연구소 연구기능과 이공계 대학의 교육 역할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하다.

그간 대개의 연구소와 대학들이 항상 영역을 확보하고 담을 높이 쌓아왔기 때문에, 같은 분야라도 담장을 넘는 교류가 별로 없고, 젊은 학생들간.연구원들간 혹은 이들간에 상호 시너지를 일으킬 인접분야 기술을 파면서도 학과가 다르고 연구팀이 다르면 중진교수나 선임연구자들은 거의 서로 상관 않고 살아오며, 그들의 후배들도 그렇게 배워오며 큰 것이 사실이다.

대덕 연구단지는 아직까지는 상호 무관한, 적어도 상호 무관하게 운영되고 있는 여러 연구소들이 지역적으로만 모여 있는 곳이다.

연구소간, 이공계 대학간의 담을 기관장.총장의 키보다 훨씬 낮춰준다면, 엄청난 동일.인접 분야간 젊은이들의 교류.협력과 힘있는 창업의 물결이 터질 것이고, 이에 의한 배움과 기술의 진보는 이들을 가둬두고 연구케하고, 가르쳐 왔던 시절에 비해 훨씬 크고 빠를 것이다.

연구소는 연구의 탁월성을 유지하는 핵심 연구진이 기둥을 이루는 한편, 기술을 들고 세상으로 나가려는 실용적 기술과 창업을 준비하는 팀이 벗어지는 껍질처럼 그 둘레를 싸고 있어야 한다. 이 두 기능 중 한가지로 각 연구원들은 진로를 정하고 선언해야 한다.

그러면 연구소는 위로도 쭉쭉 뻗으며, 곁으로 퍼지는 가지들로 세상으로 기술과 사람을 보내는 원천의 역할을 둘 다 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대학의 이공계 교육은 교수들의 권역다툼의 희생이 돼서는 안된다. 순수학문은 호기심만으로 효율성과 무관한 연구를 하는 곳에서 미래의 수요를 미리 대비하는 자세로 바뀌어야 하고, 응용학문은 아무것이나 당장 돈 버는 연구가 아니라 고난도 핵심기술에 도전해야 한다.

끝으로, 정부는 벤처를 숫자로 표시하는, 따기만 하면 되는 열매가 아니라, 미래로의 여행길에 긴 터널을 이제 진입하는 이 땅의 과학기술과 기업경쟁, 활동의 심각한 몸짓으로 보고, 연구비.세제 혜택 같은 단기적 감미료보다는 뿌리를 파고 대주는 거름같은 인프라 개혁에 삽을 들어야 한다.

큰 힘과 큰 돈을 가진 정부는 큰 일에 눈을 돌려야 한다. 이 사회에 진정으로 성공한 개혁이 무엇이 있는가. 연구소도 그대로, 대학도 그대로, 과학고.초중교가 모두 그대로인 것은 뽑아놓은 정부가 그대로이기 때문 아닌가□ 하이테크 벤처는 연구소와 대학 안에서 생성되는 미래를 뚫고 갈 우리의 첨병인 것이다.

TST 힐의 반역자들과 이들을 둘러싼 정부.연구소.대학의 변화에 거는 기대는 그래서 어느 때보다 크다

경종민 <한국과학기술원교수.전기전자공학과>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