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황순원 문학상 최종 후보작 지상중계] 8. 시 - 이재무 '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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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모름지기 시인이란 연민할 것을
연민할 줄 알아야 한다
과장된 엄살과 비명으로 가득 찬
페이지를 덮고
새벽 세 시 어둠이 소복이 쌓인
적막의 거리 걷는다
잠 달아난 눈 침침하다
산다는 일의 수고를 접고
살(肉) 밖으로 아우성치던 피의
욕망을 재우고 지금은 다만,
순한 짐승으로 돌아가 고른 숨소리가
평화로운 내 정다운 이웃들이여,
누구나 저마다의 간절한 사연 없이
함부로 죄를 살았겠는가
머리에 이슬 내리도록 노니다가
발부리에 걸리는
돌 하나 집어 주머니에 넣는다

<전문, '문학 판' 2003년 겨울호 발표>

◆ 이재무 약력
-1958년 충남 부여 출생
-83년 '삶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 '위대한 식사''섣달 그믐'
-2002년 난고문학상
-미당문학상 후보작 '돌' 외 26편

미당문학상 후보작이 27편이나 되는 시인 이재무씨는 "원래 다작인 편"이라고 밝혔다.

자연스럽게 시작(詩作) 과정이 궁금해졌다. 이씨는 "시상을 머릿속에서 오랫동안 가다듬거나 계획하지는 않는다. 영감이나 몸의 감각처럼 시가 다가오는 순간 순발력에 의존해 쓰게 된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그는 "퇴고할 필요가 별로 없는 완전한 모습의 시가 초고부터 씌어진 경우 좋은 시가 많았다"고 밝혔다.

이씨는 27편 중 '돌'과 '테니스 치는 여자' 사이에서 고민했다. 두 시 모두 특유의 시작 과정을 거친 좋은 시들일 게다. "지면이 한정돼 가급적 짧아야 한다"는 주문에 '돌'을 독자들에게 소개하기로 결정했지만 아무래도 이씨의 마음은 '테니스 치는 여자'에 기우는 듯했다.

'테니스 치는 여자'는 1980년대 시쓰기를 시작한 자신의 세대가 시대적 중압감에 눌려 그동안 무겁고 진지한 시에 치중해온 데 대한 반작용으로 씌어진 시다.

이씨는 "자유롭게 시를 대하고 싶었고 시와 놀고 싶었다"고 말했다. "테니스 치는 여자는 물 속 유영하는 물고기 같다/그녀의 동작은 단순하지만 매우 율동적이다"라고 시작하는 시는 생동감과 탄력이 넘친다.

'돌'을 쓰던 날 이씨는 "보통 잠자리에 드는 오전 한 시를 넘겨 세 시가 됐는데도 잠이 오지 않아 거대한 묘지, 진공 상태 같은 아파트 단지를 둘러봤다"고 말했다. 순간 낮시간에 제도와 질서가 부과하는 고투를 겪으며 죄지었던 사람들이 한밤중에는 선한 인간의 본성으로 돌아가 잠들어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씨는 "이해타산이 지배적인 가파른 시대를 살다보니 어쩔 수 없이 죄를 짓게 되는 인간에 대한 연민.동정.공감의 차원에서 쓴 시"라고 설명했다. 이씨는 "내 시는 어렵지 않아 소통에 장애는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문학평론가 유성호씨는 "최근 이씨의 시편들은 자신의 육체를 원초적으로 구성하고 있던 유년.고향에 대한 강렬한 기억으로부터, 공존하며 세상을 살아가는 타자들로 시선을 확산하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돌'은 그런 시선의 확장이 타자들을 향한 넉넉한 연민으로 화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유씨는 "적막한 밤거리, 순한 짐승 같은 이웃들의 숨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듯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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