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밀레니엄 탕평책'을 펼 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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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사건.사고가 없는 때가 있으랴만 요즘처럼 많은 때는 드물 것이다. 화재나 붕괴로 인한 대형 참사가 끊이지 않는데다 '옷로비사건' '언론대책문건' 등 정치권력의 도덕성을 의심케 하는 사건이 연이어 터져나와 사회 전체가 불신과 불안의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다.

더욱이 이들 사건이 하나씩이라도 해결돼 가기는커녕 오히려 더 큰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있어 정치권에 대한 불신과 분노가 큰 것은 물론 특히 김대중(金大中)정부에 대한 실망이 광범하게 확산되고 있다.

국정의 최고책임자로서 이런 사태에 가장 큰 책임을 느껴야 할 金대통령이 국민정서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판단을 하고 있어 더욱 걱정스럽다.

金대통령은 지난 19일 '바르게살기운동 전국대회' 에 참석해 "국민과 함께 다짐하고 결의한 대로 1년반 만에 IMF 외환위기를 완전히 이겨냈다" 며 "여기서 방심하지 말고 개혁을 완수해 나가면 내년에는 우리 경제가 새로운 도약을 시작할 것" 이라고 천명했다.

그리고 '언론대책문건' 을 염두에 둔 듯 "언론자유와 관련해 여러가지 보도가 있으나 3년이면 임기가 끝나는 내가 왜 언론을 탄압하겠느냐" 며 "언론자유를 철저하게 보장하고 있다" 고 말했다. 요컨대 모든 것이 잘 돼간다는 뜻이다.

외환위기는 극복됐다 하더라도 경제위기가 극복된 것은 아니다. 대기업의 순이익이 크게 늘었으나 그것은 부분적 현상일 뿐 경기의 활성화로 보기는 어렵다.

IMF사태 이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더욱 심화돼 생계조차 유지하기 힘든 절대 빈곤층이 1천만명을 넘어섰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중산층이 붕괴하고 있다고 아우성이다.

무엇보다 금융개혁을 위해 무려 64조원에 달하는 공적자금을 투입했는데도 금융대란설이 끊이지 않고 있거니와, 투자신탁회사와 보험회사의 도산을 막기 위해 수십조원의 공적자금을 투입하고 있는 실정이다.

주가지수가 1천을 돌파했으나 지금 한국의 주가상승은 미국 투기자본의 이익만 채워주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IMF사태를 극복했다고 말할 수 있는지 되묻고 싶다.

金대통령은 우리 사회가 잘 돼가고 있는데 언론이 보도를 잘못해 국민이 오해하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대통령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한 국민적 의혹을 불러일으키는 문제들이 제대로 풀릴 리가 없다.

무엇보다 '옷로비사건' '파업유도사건' '언론대책문건사건' 등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한마디로 수준 이하다. 오죽하면 위기관리능력이 없다는 비난이 도처에서 쏟아져 나오겠는가.

국정감사에다 특별검사제까지 도입하고 있으나 문제를 풀어가기보다 국민의 의혹을 더 키우고 있을 뿐이다.

대통령이 모든 일을 다 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통령이 잘 해야 모든 부문이 잘 될 수 있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현 정부 들어 개혁이 잘 안되는 책임을 야당이나 재벌.노동조합.언론 등에 돌리는 경향이 있는데 그러한 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겠으나 그것은 잘못된 태도다.

김영삼(金泳三)정부 때도 그랬지만 오히려 대통령의 오만과 독선이 너무 심해 국정을 그르친 적이 많을 뿐 대통령이 힘이 없거나 수구세력의 저항이 심해 개혁이 잘 안된 경우는 드물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왕조시대의 왕보다 더 큰 권한을 갖고 있다. 과거 왕조시대에 지금과 같은 실정이 계속됐다면 목숨을 건 진언(進言)이 부지기수로 왕에게 올라갔고, 왕 또한 이를 무시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은 그런 진언을 하는 사람도 드물고 진언을 한다고 해서 수용할 것 같지도 않다.

최근 들어 정부의 실정을 두고 대통령을 보좌하는 사람들이 잘못해 그런 것이라고 해 청와대 비서진을 개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물론 대통령을 보좌하는 사람들이 잘못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을 임명한 것도 대통령이거니와 모든 문제의 최종적인 판단은 대통령의 몫이라는 점에서 金대통령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오늘 우리사회를 뒤덮고 있는 국민적 의혹을 풀고 정국을 정상화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이 현명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 다만 이것이 가능하려면 대통령이 국민의 불만과 요구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지금 국민은 정치권의 잘못에 분노하기도 하지만 모두를 피곤하게 할뿐인 이전투구(泥田鬪狗)에서 벗어나 새롭게 출발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특히 21세기 새 천년을 불과 한달여 남겨두고 있다. 묵은 찌꺼기를 털어버릴 절호의 기회다. '밀레니엄 사면' 만이 아니라 '밀레니엄 탕평책' 이 나와야 하겠다. 金대통령의 영단(英斷)을 기대한다.

장기표<신문명정책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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