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수류탄에서 원자로까지 (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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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1. 맨땅에 헤딩

국방과학연구소(ADD)가 창설된지 4개월 후인 1970년 12월 중순, 신응균(申應均.전 국방차관.작고)연구소장이 급히 나를 찾았다.

"韓박사, 한국군의 체형에 가장 적합한 수류탄을 만들어야겠어. 도대체 미군이 쓰는 것을 우리 군이 그대로 사용하니 잘 맞지가 않아. 고구마형 수류탄은 너무 무겁단 말이야. " 당시 나는 현역 공군중령으로 국방과학연구소 병참물자개발실장을 맡고 있었다.

"한국군의 체형에 맞는 수류탄이라…. " 내 방에 돌아와 申소장의 말을 되뇌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申소장의 지시는 주한미군 철수에 대비, 이제는 우리 기술로 국산무기를 개발해야 한다는 절박감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런지라 어떤 핑계로도 수류탄 개발은 지체할 수가 없었다. 나는 곧바로 서울 노량진에 있는 병참물자개발실 작업실로 향했다. 이곳은 국방과학연구소가 창설되면서 없어진 연구발전사령부가 무기개발을 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쓸 만한 장비는 하나도 없어 마치 부도난 공장을 연상케 했다. 70년 8월 연구발전사령부를 인수할 당시, 그간의 연구 보고서도 남아 있지 않았고 구성원들도 대부분 떠나버린 상태였다. 두 명의 인력을 보강했지만 병참물자개발실 인원은 고작 10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들과 머리를 싸 맬 수밖에 없었다. 서울대 수학과 출신이자 공사 2년 후배인 정해일(丁海一.62) 소령을 부책임자로 임명, 실무를 총괄케 했다.

그러나 쌀 한 가마에 7천5백원 하던 그시절, 수류탄 개발비로 책정된 예산은 고작 50만원에 불과했다. 서울 공대 조교수로 갓 강단에 선 이면우(李冕雨.54)박사와 서울 사대 체육과 김지학(작고)교수등 두 명을 연구원으로 위촉, 외부 자문을 받았다. '신사고 이론' 으로 유명한 '李교수는 당시에도 아이디어가 풍부해 '아이디어 뱅크' 로 불렸다. 金교수는 특히 수류탄 던지기 요령을 연구하는데 꼭 필요한 존재였다.

몇달 동안은 난상 토론을 거듭했다. 71년 7월 중순 일요일 아침, 우리는 워커힐 인근 한강 백사장에 모였다. 자갈로 수류탄 던지기 실험을 하기 위해서였다. 이에 앞서 그동안의 노고를 위로할 겸 먼저 수영을 즐기게 한 다음 불고기 점심으로 모처럼 흥겨운 시간을 가졌다.

오후 2시. 실험을 위해 먼저 주변에 있는 자갈을 전부 한 곳에 모은 다음 그 무게를 일일이 저울에 달고 그 위에 무게를 표시했다. 열 명의 연구원들은 金교수가 설명한 요령에 따라 자갈을 던졌다. 한국형 수류탄의 탄생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한필순 전 한국원자력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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