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553.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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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제12장 새로운 행상 (31)

그러나 마을 사람들을 만난 소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박봉환도 알고 있었던 것처럼 그들 역시 태호와 비슷한 시기에 베이징으로 자취를 감춰버린 김승욱의 행동에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도어 록을 수리한 것도 물론 그녀였다.

무턱대고 태호의 행방을 뒤쫓을 것이 아니라, 먼저 그녀를 만나는 것이 사건의 단서나 범증을 찾아낼 수 있는 첩경이었다.

그러나 옌지로 돌아가 그녀의 어머니를 설득해 보았으나 모르쇠로 버티는 것은 처음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한술 더 떠서 멀쩡해 보이던 귀까지 어두운 척 하였다.

그러나 박봉환은 늙은이의 그런 은폐술에 오히려 기대를 걸기 시작했다.

귀까지 어두운 척 한다는 것은 그녀의 거처를 알고 있다는 증거였기 때문이었다.

희망을 걸고 태호가 자취를 감춘 사건에 만의 하나 그녀가 연루되었다 하더라도 전혀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각서까지 써 주었으나 한 번 다잡아 먹은 늙은이의 마음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계교 따위가 통하지 않는 늙은이를 아침 저녁으로 만나 설득한 지 닷새 만에 드디어 김승욱이 옌지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머니와 함께 아파트로 찾아온 김승욱의 안색은 수척하다 못해 파리했다.

그리고 계속 울어댔다.

모든 불찰이 자신에게 있다고 말하면서도 태호의 행방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다고 털어 놓았다.

"그 날 새벽에 찬거리를 가지고 아파트에 찾아왔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아무리 벨을 눌러도 기척이 없잖겠습니까. 그래서 문을 당겨 보았더니, 문이 저절로 열립디다.

그때 가슴이 뜨끔했지 않겠습니까. 이상하게 집 안 공기가 싸늘하지 않겠습니까. 불을 켜고 보니까, 거실 여기 저기에 진흙 발자국이 어지럽게 널려 있잖겠습니까. 가슴이 덜컥 내려 앉고 뒤에서 누가 머리 끄덩이를 잡아 당기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악 소리 치고 밖으로 뛰어 나오고 말았단 말입니다.

인차 집으로 전화를 걸어 어머니를 불러냈습니다.

혼자서는 도저히 집 안으로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더란 말입니다.

나는 정신이 빠져서 모르고 있었는데, 자물쇠가 부서진 것도 어머니가 발견하고 새 것으로 바꿨단 말입니다.

태호씨가 어디로 끌려간 것 같기도 하지만, 남겨둔 흔적이 있거나 의심을 할 만한 상대가 있어야 알아보지 않겠습니까. 도대체 어찌 할 바를 모르고 하루 종일 벌벌 떨고만 있는데, 그 날 밤에 집으로 전화가 걸려 왔지 않겠습니까. 낯선 남자 목소린데, 태호의 행방을 찾으려고 사방으로 설치고 다니면, 나를 가만 두지 않겠다고 협박하고 일단 옌지를 떠나 있으라 하고는 인차 전화를 끊어버렸단 말입니다.

제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언제까지 베이징에 있을 작정이었습니까?"

"가게를 쑥밭으로 만들어 버리고 앞으로는 장사도 못하게 만들겠다고 협박하지 않겠습니까. 태호씨도 흔적 없이 사라지고 없는데,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 사람들이 시키는대로 옌지를 떠나 있어야 태호씨도 무사하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우리 집 전화번호는 물론이고, 가게의 위치며 나와 태호씨의 관계를 어머니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사람들과 힘을 겨뤄 볼 용기가 나지 않더란 말입니다.

베이징에 나가 있는 동안 그 사람들로부터 돌아와도 좋다는 연락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단 말입니다.

내 나름대로 여기저기 알아 보았지만, 도대체 그들이 누군지 정체를 알 수 없단 말입니다."

"그 말도 나한테는 날벼락이네요. 여기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온 곳인데도 그 사람들 정체가 누군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는 게 말이 됩니껴?"

"옌지의 경기가 좋아지고부터 산둥성에서 많은 한인들이 물밀 듯이 옌지로 들어와 살게 되었지만, 반대로 조선족들은 돈벌이를 하겠다고 중국 각지로 흩어져서 옌지의 분위기가 옛날과는 아이 같습니다.

하루가 무섭게 변해 가고 있단 말입니다.

누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졌단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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