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조 백일장 8월] 초대 시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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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온몸으로 여름을 끌고 넘은 길들이
찢기고 패이고 뭉그러진 등으로
차들을 올려다보다 나직이 엎드린다

길을 늘 저렇게 업고 가는 길처럼
이 땅의 허리 휜 수많은 누이들은
말없이 등을 내밀어 저녁이 되곤 했다

그런 저녁 등짝엔 옥수수가 익어도
먼 도시 불빛을 샛별인 양 쥐어주며
가문의 길이 되라고 아우를 흔들었다

그렇게 한 시절을 업어 업어 건네준
숱 많은 머리채의 이름모를 지방도
그녀의 여윈 잔등을 쓸어본다, 어머니

정수자

◇ 약력=▶1957년 경기 용인 출생▶84년 세종숭모제 백일장 장원으로 등단▶중앙시조 대상.한국시조작품상 등 수상▶시집 '저녁의 뒷모습'

◇ 시작노트=굽이마다 길에는 사연도 많다. 그 중 오래 어리는 건 비켜 선 여자들의 길이다. 한때 얼마나 많은 누이가 웃으며 혹은 눈물을 머금고 남자 형제의 길을 밀어줬던가. 그이들이 접은 길엔 오늘도 달맞이꽃이 피고 옥수수가 익는다. 쓰라린 젖은 등을 그대 기억하는지, 지방의 후미진 길들이 올려다본다. 소외가 깊을수록 길섶은 푸르렀지만, 도처에 앉은 한숨이 길보다 두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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