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거리는 동구] 14. 마지막 비상구 EU와 나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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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9월 1일 오후 사전 약속에 따라 슬로바키아 루도비트 체르나크 경제장관 집무실을 찾았으나 1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다. 땀을 닦으며 나타난 체르나크 장관은 "유럽연합(EU)쪽 인사가 갑자기 방문하는 바람에 늦었다" 며 미안해했다.

EU국가인 오스트리아 대사가 핵발전소 안전문제와 관련해 협의가 필요하다며 불쑥 방문, 다른 일정을 모두 미룰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했다.

"우리나라로선 EU가입이 최대 목표랍니다. " 9월 6일 만난 슬로베니아의 안드레이 플라후트니크 경쟁청장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EU 요구대로 새로운 공정거래법안을 만드느라 몇달동안 쉴새없이 작업하는 바람에 그렇다" 고 설명했다.

현재 대부분의 동구국가에서 EU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가입은 그야말로 지상명제다. 마케도니아의 키로 글리고로프 대통령은 21세기 마케도니아의 꿈을 묻는 본사 기자의 질문에 EU가입을 맨 먼저 꼽았다.

불가리아의 페타르 스토야노프 대통령도 EU가입과 나토가입이 국가의 가장 절실한 과제라고 밝혔다.

94년 EU 준회원국 자격을 얻은 폴란드에서 EU가입은 여야를 떠나 국가 지상과제라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예지 부제크 폴란드 총리는 "폴란드에 투자하면 EU국가에 미리 투자하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 며 EU가입을 기정사실화하면서 한국 등을 상대로 비즈니스 외교를 펼치고있다.

심지어 옛 소련의 공화국으로 있다 독립한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의 발트 3개 군소국가는 국가의 장래운명이 EU와 나토가입에 달려있다고 보고 국경을 맞댄 러시아의 확고한 반대의사에도 불구하고 물러서지 않고 있다.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러시아의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집단적 안보와 경제보호의 우산 아래 들어가겠다는 열망이 가위 필사적이다.

EU가입은 대부분의 동구국가에서 70~90%의 지지를 얻고 있다. EU가입을 열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헝가리 무역투자청의 길리안 처버 국장은 "가입후 교역량 증대에 따른 경제성장 효과와 EU의 지역개발 보조금 수혜에 대한 기대감" 을 첫손으로 꼽았다.

슬로바키아 경제지 트랜드의 요세프 하이코 편집장은 "현재 동구국가 교역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EU 없이는 시장도, 성장도 없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고 말하고 "EU가입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 라고 말했다.

폴란드 사회과학원의 예지 홀제르 정치학 연구소장은 "EU가입은 서구사회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고 평하고 "동구인들은 EU가입에 대해 '절대 놓치면 안되는 열차' 라는 강박감을 갖고 있다" 고 말했다. EU가입은 동구체제변환의 마지막 단계라는 것이다.

94년 헝가리를 필두로 현재까지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슬로베니아.루마니아.불가리아.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의 10개국이 EU가입 신청서를 정식 제출했다. EU집행위는 이들 국가에 EU가입 조건으로 모든 국가시스템을 EU기준으로 고칠 것을 요구하며 가입결정을 미루고 있다.

폴란드에서 가장 권위있는 영자지 '바르샤바 보이스' 의 안제이 요나스 편집국장은 지난 94년 폴란드 등이 EU 준회원국으로 가입한 것을 '약혼' 에 비유했다.

그는 "폴란드 등은 약혼상태가 너무 길다고 불평하는데 이에 대해 EU집행위는 결혼 준비도 안된 상태에서 무슨 결혼이냐는 입장이다.

폴란드 등은 결혼날짜를 잡아줘야 그에 맞춰 준비를 할 게 아니냐고 반박하고 있는 형국이다" 고 말했다. 하지만 EU가입을 위한 길은 험난하다.

EU가입 희망국 전부가 하루가 멀다하고 가입기준 충족을 위한 각종 법령을 양산하고 있다. EU기준에 맞추려면 2만여개의 법령을 새로 제정하거나 개정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바뀐 법령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워낙 정신없이 모든 법령과 제도가 바뀌다 보니 실무 담당자들도 변경사항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정도다.

현실에 맞지 않거나 동구국가에 불리한 요구도 적지 않다. 슬로베니아는 올 8월 EU의 요구대로 부가세를 도입했다. 세율이 17%나 되다 보니 물가가 오르고 경기가 침체되는 등 부작용이 이만저만 큰 게 아니다.

게다가 가입신청국과의 협상에서 EU는 '상품기준' 이란 잣대를 이용, 오히려 동구에 대한 무역규제를 강화했다.

반면에 동구 10개국은 EU수출에 대한 장벽을 거의 허물고 시장을 개방했다. 때문에 시장 종속, 경제적 자주권의 상실에 대한 우려도 크다.

EU가입 후 자유경쟁 상태가 됐을 때 과연 동구 각국의 산업, 특히 농업이 경쟁력을 갖고 살아남을 수 있겠느냐는 근본적 회의도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고통과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신청국 어디에서도 가입신청을 철회하자는 주장은 들리지 않는다.

그 어떤 비용을 치르더라도 가입하는 것이 득이란 인식이 지배적이다. EU가입과 한 궤를 이루고 있는 동구국가의 나토가입에 대해 슬로바키아 공공문제연구소 그레고리 메세즈니코프 소장은 "EU에 대한 열정에 비해 나토가입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율은 낮다" 고 밝혔다.

국민들이 과거 러시아와의 군사동맹 때의 강제동원을 연상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그는 "어떤 형태든 안전보장체제가 필요하며 지역 안보체제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 라고 못박았다.

◇ 특별취재팀〓김석환.배명복 특파원, 채인택.최준호.김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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