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상을 밝힌다. 1.기사 삭제-제목교체 강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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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우리 신문들이 너무 좀…, 뭐라 할까…. 우리 쪽을 자꾸 때리는 식으로 기사를 쓰는 것 같애. 그 부탁을 오늘 좀 하라고…, 그래서 내가 얘기하는데…."

지난해 7월초 청와대 국내언론담당 박준영 비서관(현 공보수석)이 정치부 데스크에 걸어온 전화는 이렇게 시작된다.

요지는 비판적인 기사를 쓰지 말아달라는 것.

그의 말 가운데서 '언론들이 정권을 너무 비판한다' 는 피해의식과 '언론으로서 비판적 논조를 지속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 는 나름의 언론관이 짙게 묻어 나온다.

아무튼 시작은 이렇게 '점잖지만' 톤이 높아지면서 구체적인 외압으로 바뀐다.

이 정권이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사안은 단연 김대중 대통령 본인과, 그 친인척이 관련된 기사들이다.

그런 만큼 취재에도 각별한 주의가 기울여진다.

하지만 청와대는 기사내용의 진위 여부와 무관하게 기사 자체를 완전삭제할 것을 요구해오곤 했다.

현 정부 출범 직후인 지난해 3월 7일자 사회면(27면) 초판에는 '대통령 낳은 천하명당(天下明堂) 구경이나 좀' 이라는 제목의 화제기사가 실렸다.

金대통령이 95년 부모의 묘를 이장한 경기도 용인의 가족묘원이 명당으로 알려지면서 구경꾼들이 모여든다는 가벼운 내용이었다.

"어른께서 아주 언짢아하십니다."

7일자 신문이 한창 인쇄되던 6일 밤. 지방에 보내기 위해 제작된 초판 신문을 미리 입수한 청와대 박준영 비서관이 편집국장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朴비서관은 다짜고짜 "대통령을 흠집내는 기사" 라며 정치적 의도가 있는 게 아니냐는 식으로 추궁해왔다.

결국 '무조건 안된다' 는 식의 으름장이 먹혀 그 기사는 지면에서 사라졌다.

지난해 국정감사가 한창이던 10월 21일, 중앙일보는 대통령의 친동생 김대현(金大賢)씨와 관련된 의혹기사를 단독취재했다.

대현씨가 운영하는 '한국사회경제연구소' 가 산업자원부 산하 산업디자인 진흥원으로부터 특혜를 받았다는 내용. 진흥원이 경영진단을 의뢰하면서 3천여만원을 용역비로 제시한 기관을 제쳐놓고 그보다 두 배 가량 많은 돈을 요구한 대현씨의 연구소에 용역을 준 것이다.

정치부 데스크는 사안의 민감성을 감안, 편집국장 등 극히 일부에게만 오후 9시에 마감되는 41판부터 기사화한다는 계획을 통보했다.

그런데 그 직전 박준영 비서관의 전화가 걸려왔다.

아직 관계기사가 출고되기 전인데도 이를 알아챈 朴비서관이 '대현씨 관련 기사를 쓰려고 한다는데, 기사화하지 말아달라' 는 요구를 해온 것이다.

때문에 중앙일보 내부적으로는 도청장치 설치여부 및 컴퓨터 해커의 침입여부를 확인하는 한바탕의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어쨌거나 전화를 통한 강압이 못미더운지 그날 밤 朴비서관은 아예 편집국으로 찾아와 다음날 새벽 기사가 완전히 마감될 때까지 편집국에 진을 치고 기사화를 감시했다.

결국 이 관련기사는 그날 출고되지 못했다.

다만 사흘이 지난 24일 국감 도중 한나라당 맹형규(孟亨奎)의원이 관련 발언을 하면서 지면에 반영됐다. 아주 축소된 형태로. 그러나 정권의 압력이나 항의가 있다고 무조건 기사를 삭제하거나 순화하는 것은 아니다.

중앙일보는 정권 출범 직후 조각이 완료되고 주요 인선이 마무리되자 당시 최대 이슈가 된 '지편중인사'시비를 검증키로 했다.

지역감정,갈등을 극복해 보자는 목적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장,차관 등 고위직의 출신지와 학력,경력을 통계처리해 3월 9일부터 연재된 '파워엘리트가 바뀐다'라는 시리즈다.

객관적 통계자료에 근거한 보도임에도 불구하고 청와대와 국민회의쪽 항의전화가 쏟아졌다. 당시 박지원 청와대 공보수석은 "사회적 갈등을 조장하는 기사"라고 비난하면서 "정권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는 것 아니냐"며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국익과 관련된 기사의 경우 중앙일보는 이를 최대한 배려하는 노력을 기울였다.물론 국민의 알 권리와 진실규명을 위한 자세는 유지했다.

지난해 11월 20일 북한핵 문제가 핫이슈가 됐을 때 중앙일보는 '한,미 양국이 북한 금창리에서 플루토늄의 흔적을 확인했다'는 사실을 단독보도했다. 금창리 시설이 핵시설이냐, 아니냐를 둘러싼 논란이 한창일 당시 수개월에 걸친 추적결과 핵 관련 시설임을 확인했다. 이와 함께 확인과정에서 공을 세운 군정보기관 관계잘들에게 훈장이 수여된 사실도 증거로 확보했다.

19일 밤, 먼저 인쇄된 초판을 통해 보도내용을 알게된 국방부는 당장 '사실무근'이라며 부인했다. 청와대 담당비서관은 절대 아니다. 큰 오보다. 당장 빼달라"며 사실을 호도하려고 했다. 행여 햇볕정책에 차질을 빚을까 해 법석을 피운 것이다. 국방부 정책 보좌관 김인종 중장은 기사삭제를 요구하기위해 편집국으로 달려왔다.

당시 데스크는 김중장에게 "사실이 아니라고 부안하려거든 그냥 돌아가달라. 대신 국익을 위해 우리가 꼭 협조할 사안이 있다면 협조하겠다"고 전제했다. 그러자 김중장은 "신변상 문제가 있으니 군 정보 관계자들의 신상관련 내용을 빼달라"며 물러섰다. 이 부분은 흔쾌히 받아들여졌다. 김중장은 되돌아 갔다가 새벽에 전화를 걸어와 "기사를 전부 빼 달라"고 요구했으나 이는 무시됐다.

외압에 저항하고 때로 무릎을 꿇는 상황은 중앙일보 내부의 갈등을 불러오기도 했다. 지난해 7월 20일 본사 경영진과 저녁식사를 하던 박지원 수석은 '하반기 경기 더 나빠진다'라는 초판의 1면 톱기사 제목을 보고는 즉각 제목교체를 요구했다. 경영진은 이를 수용, 야간 데스크에게 전화를 걸어 제목변경을 지시했다. 데스크는 "정확하다. 바꿀 이유가 없다"며 항의했다. 경영진은 "곤란한 사정"이라며 수정을 거듭 지시, 중앙일보 내부 갈등의 한 켜를 더했다.

경엉진이 편집간부에게도 밝히기 곤란한 사정은 정권의 세무조사가 시작되면서 더욱 깊어갔다.

독자들은 대수롭지 않게 지나칠지 모르나 대하는 기사 한줄 한줄에는 이를 취재, 보도하기위한 언론사 관계자들의 고뇌가, 때로는 말 못할 사연들이 숨어 있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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