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거리는 동구] 1.미숙한 자본주의 체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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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배고픔은 더해졌지만 그래도 자유를 잃고싶지는 않아요. " 9월 초 신유고연방 베오그라드의 중심지 공화국 광장의 한 카페에서 만난 미롤류브 스토야노비치(43)는 공산체제가 붕괴된 후 살림형편은 더욱 어려워졌다고 말한다.

그의 한달 봉급은 5백디나르(약 5만원). 15년째 한 직장을 다니고 있는 그는 요즘 점심을 거른다. 길거리에서 파는 햄버거 하나가 30디나르나 되기 때문이다.

7년을 사귄 애인과도 최근 헤어졌다. 만나서 커피 한잔, 맥주 한잔 마실 수 없는 형편에 결혼을 차일피일 미루다 서로 금이 간 것이다.

91년 유고연방이 해체되기 전까지 공산체제아래서 그는 매년 2개월이 넘는 휴가를 인도.아프리카.남미 등 해외에서 즐겼다고 했다.

하지만 91년부터 94년 사이와 비교하면 지금은 그나마 시장에서 값싼 농산물을 살 수 있어 다행이다.

93년 당시 엄청난 인플레로 화폐가치가 1만대 1로 폭락했으며 이듬해에는 1백만대 1로, 94년에는 1천2백만대 1로 다시 떨어졌다. 사상 최고의 인플레였다.

공산체제를 막 탈피하기 시작한 당시 유고 정부가 화폐경제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내전에 필요한 전비 마련을 위해 돈을 마구 찍는 바람에 발생한 일이다.

공산주의자에서 극렬 민족주의자로 변신한 밀로셰비치 대통령의 진두지휘아래 유고는 옛 유고연방의 해체와 내전, 거기에 올 봄에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융단공습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스토야노비치는 "먹고 사는 문제로만 본다면야 그때가 그립지만 공산체제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고 단언했다.

"이젠 거리에서 말이라도 마음껏 할 수 있고 시위라도 벌일 수 있는 자유가 있지 않으냐" 고 반문했다.

같은 시기 체코 프라하 최고의 번화가 바츨라프 광장 주변에 위치한 여행사 피셔 라이젠의 바클라프 피셔(45)사장은 6층 사무실에서 밀린 E메일을 확인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전화를 설치하려면 1년여를 기다려야 하는 동구 국가가 수두룩하지만 독일산 사무기기로 채워진 그의 사무실은 서구의 첨단빌딩 내부를 연상케한다.

검은 티셔츠의 캐주얼 차림으로 근무 중인 그는 "변화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세상" 이라며 오늘의 동구를 설명했다.

프라하 경제대 재학시절 서구 관광객들의 가이드로 학비를 벌며 그는 관광객들을 선망의 눈으로 쳐다보는 체코인들의 마음을 읽었다. 그것은 "아무런 통제 없이 해외로 나가고 싶다" 는 열망이었다.

대학졸업 후 곧바로 옛 서독으로 날아간 그는 한차례 사업에 실패하며 냉혹한 자본주의 수업을 받았다.

그리고 때가 왔다. 89년 동구 각국의 국경이 열리자 그는 숨겨진 관광지를 발굴하며 여행객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10년, 피셔 라이젠은 이제 체코의 관광공사격인 체독을 제외하고는 체코 1위의 관광업체로 성장했다. 그사이 항공사까지 차렸다.

좌석 지정제마저 없는 일반 고속버스의 소음에 시달리다 갑자기 '쌩' 하고 지나가는 최신식 버스가 있으면 여지없이 피셔 라이젠의 상징인 코끼리가 새겨져있을 정도다.

지난 8월 그는 상원의원으로 선출됐다. 동구에서 우등생에 들어가는 체코지만 "답답해서 더 이상은 못보겠다" 는 것이 그의 출마 이유다.

목표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지금까지 체코에 없었던 것을 발견하고 개발하는 것" 이라고 답했다. 일부는 변화의 속도를 맞추는 것마저 벅차하는 상황에서 그는 또다시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있는 셈이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를 나누던 벽이 허물어진 자리에 이제 부자와 가난한 자, 부국과 빈국을 가르는 새로운 장벽이 세워지고 있는 것이다.

독일 민사당(PDS.옛 동독공산당의 후신)의 2인자인 볼프강 게르케(56)원내총무는 최근 일련의 독일 주의회 선거에서 나타난 집권 사민당(SPD)의 '도미노 패배' 를 동독주민의 민심이반 현상으로 풀이했다. 동.서독간 임금격차로 동독주민의 50%가 좌절감을 느끼고 있다는 설명이다.

베를린자유대 하이네 가스만(경제학)교수는 "국가간 소득격차가 워낙 벌어져 베를린 장벽이 새롭게 부활하고 있다" 고 한탄했다.

뮌스터대 송두율(宋斗律.사회학)교수는 "앞으로 EU가입국과 미가입국을 가로지르는 장벽은 더욱 높고 튼튼해질 것" 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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