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523.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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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제12장 새로운 행상①

작은 메모지에 백사장 포구에 있는 서문식당의 소재지를 소상하게 그린 약도를 손에 들고 뚫어지게 내려다보고 있던 태호의 시선이 흐려졌다. 구태여 묻지 않아도 한철규가 손수 그린 약도였고 글씨였기 때문이었다.

만의 하나 승희의 발걸음이 어긋날까 해서 식당 근처의 좁은 골목길까지도 빠뜨리지 않으려고 기억을 더듬은 흔적이 뚜렷한 약도에는 승희를 떠나보내야 하는 한철규의 소홀히 할 수 없는 가슴앓이가 깨알처럼 박혀 있었다.

승희 만큼은 곁에 두고 헤어지는 아픔을 겪고 싶지 않았던 한철규의 애틋함이 주소와 전화 번호만 꾹꾹 박아쓴 작은 글씨들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이제 막 철부지의 허울을 벗은 아들에게 첫 심부름을 보낼 때 가지는 아버지의 극진한 염려를 생각하게 하는 약도였다. 오랫동안 메모 쪽지에 박혀 있던 시선이 승희를 일별했다.

그녀와 만났던 이후부터 이때까지 승희라는 여자가 그처럼 우직하고 미련하게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그러나 태호의 입가에 번지는 씁쓰레한 웃음을 승희 또한 놓치지 않았다.

"내가 길을 잘못 들었는가봐?" "아닙니다. 잘 왔네요. 봉환이형이 앓아 누워 일손이 턱없이 모자라잖아요. " 말은 그렇게 얼버무렸지만, 그녀의 출현을 썩 반기는 눈치는 아니었다.

물론 한철규를 따돌리고 떠나온 것에 대한 태호의 섭섭함 때문이란 것을 깨달았다. 그래선지 태호는 중국길이 평탄하지 않을 것이란 것부터 겁을 준 다음 몇번인가 동행해도 좋겠느냐는 다짐을 두었다.

다짐을 받고 있었지만, 내심으로는 중국행을 단념할 수 있는 기회를 주려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 태호의 속내가 빤히 들여다 보일수록 승희의 태도는 더욱 강경하기만 했다.

두 사람이 핏대가 올라 붉으락 푸르락할 일보 직전에서 태호가 양해하는 쪽으로 기울고 말았다. 중국에서 탈진해 돌아온 기력을 벌충한답시고 손씨가 보약을 먹는 동안, 두 사람은 뻔질나게 서울을 드나들면서 웨이하이로 가져갈 상품들을 구입해서 인천항으로 탁송하였다.

품목은 지난번 파수에 한철규가 가져갔던 상품들 그대로였다. 그동안 태호는 승희가 보란듯 고흥으로 전화를 걸어 안면도에서 돌아가는 내막을 숨김없이 전달하고 물자를 구입한 내역 따위를 세세하게 일러주었다.

안면도에 있는 사람들의 장삿속도 한철규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승희에게 은근히 과시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철규가 승희의 안부에 대해서는 전혀 묻는 법이 없었기 때문에 자청하여 그녀의 안부를 전달하기가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태도에서 오히려 그녀를 떠나보내야 했던 그의 쓰라린 가슴 속을 명료하게 읽을 수 있었다. 얄미운 것은 승희의 매몰스런 태도였다. 한철규와 통화하고 있는 것을 바로 곁에서 빤히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수화기를 바꿔달라는 말은 없었다.

한철규 역시 그녀의 매몰참을 거울보듯 읽고 있는 것처럼 승희의 신상에 대해선 묻지 않았다. 인천항에서 여객선을 탄 것은 그녀가 안면도에 당도한지 열흘 후의 일이었다. 승희와 태호, 그리고 손씨였다.

지난번에 그토록 혼찌검이 났으면서도 순순히 동행하는 손씨의 내심을 알아채기 어려웠는데, 여객선을 타고 나서야 그 까닭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승선해서 세시간 뒤쯤 지갑을 열고 린민삐 (인민폐) 를 헤아리다 우연히 떨어뜨린 한 장의 사진이 단서가 되었다.

그 사진을 떨어뜨린 것을 눈치채지 못했던 손씨가 몰래 가져온 린민삐를 헤아리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승희가 바닥으로 뚝 떨어지는 사진 한 장을 주워든 것이었다.

말없이 사진을 내밀며 눈으로 누구냐고 묻는 태호에게 손씨는 어물쩍 넘기려 들었다.

"응, 그 사진 우리가 드나들었던 안마방에서 주운 거여. " 사진을 훌쩍 빼앗아 지갑 속으로 넣으려는 손씨에게 태호가 물었다.

"안마방에 떨어진 사진이 형님 지갑에 왜 들어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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