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살아나는 토종 ② 붉은 여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2면

9일 오후 경북 영양군 입암면 영양산촌생활박물관. 박물관 한쪽 200여 m²의 땅에 흙과 톱밥 등을 깔아 만든 철제 우리에 토종 여우 네 마리(암수 각 2마리)가 살고 있다.

영양군청 산림축산과 소속 공무원 이병규(49)씨가 토막낸 돼지고기를 놓고 나가자 수컷 한 마리가 슬금슬금 다가와 냄새를 맡는다. 주위를 둘러보더니 고깃덩어리를 덥석 문다. 그리고 우리 구석에서 앞발로 재빨리 땅을 판 뒤 음식을 묻고 다시 흙으로 덮는다.

“여시다, 여시(여우의 방언).” 주변에서 숨죽여 지켜보던 군청 직원들과 관광객들이 한마디씩 내뱉었다. 여우는 흙을 파헤치는 습성을 보여주듯 우리 곳곳에 흙무더기를 만들어 놓고 있다. 귀가 뾰족하고 적갈색 털을 가진 토종 여우는 흔히 ‘붉은 여우’로 불린다. 개과 동물인 여우는 은여우·사막여우·큰 귀 여우·북극여우 등이 있으나 예부터 한반도에 서식해온 종은 ‘붉은 여우’뿐이다.

‘여우 같다’ ‘호랑이 없는 숲에 여우가 왕노릇 한다’ 등의 비유와 속담에 등장하는 여우는 1950~60년대 초만 해도 야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물이었다. 그러나 ‘한 마리를 잡으면 집을 한 채 살 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여우털이 고가에 팔리면서 남획되기 시작했다. 급기야 60년대 말 자취를 감췄다. 2006년 3월 23일 강원도 양구에서 여우 사체가 발견되면서 극소수가 살아있는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토종 여우 복원이 시작된 건 2006년 봄. 서울동물원장으로 있던 서울대 신남식(수의학과·사진) 교수가 복원사업을 제안했다. 신 교수는 “환경부가 차세대 과제로 ‘멸종·절종동물 복원사업’을 선정했는데 우리에게 친숙한 동물이면서도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여우를 복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2006년 4월 중국에서 여우 7마리를 수입했다. 하지만 유전자 감식 결과 ‘토종’이 아닌 것으로 판명됐다. 한 번의 실패로 멈출 수 없었다. 신 교수는 2008년 10월 북한에서 토종 여우 15마리를 들여왔다. 그중 4마리를 강원도 횡성으로 데려가 1년여 동안 키우며 행동·습성을 분석했다. 연구가 거듭되는 동안 경사가 났다. 서울동물원에 있던 토종 여우가 자연번식에 성공해 5월 세 마리가 태어났다. 그 결과 동물원의 토종 여우는 14마리로 불어났다. 그러나 신 교수는 붉은 여우를 방사(放飼)할 적절한 장소를 찾지 못해 고민해야 했다. 이때 영양군이 ‘같이 해보자’는 제의를 해왔고 8월 초 ‘토종 여우 증식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인력과 예산을 영양군이 지원하고 신 교수가 연구를 맡기로 역할 분담을 했다. 영양군은 토종여우를 중심으로 ‘생태관광’ 붐을 조성해 지역경제를 일으키겠다는 목표를 세워놓고 있다.

영양군은 5000만원을 들여 여우 우리를 지었다. 산림축산과 소속 공무원 2명과 수의사 1명을 여우 담당으로 지정했다. 이들은 신 교수의 조언에 따라 먹이는 하루에 한 번, 오후 3~4시에 돼지고기나 닭고기를 1.5kg(4마리 분) 준다. 1주일에 한 번씩은 여우가 좋아하는 간식인 포도를 1마리당 1송이씩 준다.

여우는 한 번에 서너 마리의 새끼를 낳지만 성격이 예민해 번식률이 낮은 편이다. 신 교수는 “2~3년 동안은 자연 번식을 시도한 뒤 나중에 복제나 인공수정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영양군은 10월 중 우리에 폐쇄회로TV를 5대 설치해 서울대 연구팀이 서울에서 실시간으로 여우를 관찰할 수 있도록 도울 예정이다. 여우의 교미 시기인 1~3월에는 차광막을 설치해 성격이 예민한 여우가 쉽게 번식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 계획이다.

신 교수는 “복원의 관건은 자연 방사 시 여우의 적응 여부”라며 “멸종된 동물이 생태계에 다시 등장할 때 생기는 문제에 대해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영양=임주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