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분한 시간과 땀만이 최고의 골프장을 만든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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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호 16면

스코틀랜드 전통 의상을 입은 키드. 골프장 설계에 대한 그의 신념은 ‘순수한 골프의 추구’다.

미국 오리건주에 자리잡은 바닷가의 작은 도시 밴던(Bandon). 101번 국도를 타고 남서쪽으로 달리다 보면 미국 최고의 링크스 코스로 불리는 골프장이 나타난다. 1999년 문을 연 밴던 듄스(Bandon Dunes) 골프 리조트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밴던의 모래언덕’쯤 될 터인데 이름 그대로 자연 그대로의 모래 언덕과 수풀이 한데 어울려 장관을 이루고 있는 게 특징이다. 이 코스를 걷다 보면 바닷가 모래언덕을 따라 수백 년 전부터 골프 코스가 들어서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만큼 코스가 자연스럽다는 뜻이다. 밴던 듄스가 해마다 세계의 명문 코스로 선정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골프다이제스트 선정 ‘올해의 코스 설계가’데이비드 키드

밴던 듄스를 설계한 사람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코스 디자이너 데이비드 맥레이 키드(42·David MaLay Kidd)다. 지난 7일 한국을 찾은 그를 만나 명문 코스란 과연 어떤 것인지 이야기를 들어봤다. 한국의 뜨거운 골프 열기를 잘 알고 있다는 키드는 골프 코스 설계와 관련한 자신의 철학을 2시간이 넘도록 설명했다.

“저는 기억에 오랫동안 남는 코스가 좋은 골프장이라고 생각합니다. 명문 코스를 선정할 때 여러 가지 덕목이 있지만 저는 기억에 얼마나 남느냐를 가장 먼저 따지는 편이지요. 방금 돌아본 코스인데도 기억에 남지 않는다면 훌륭한 골프장이라고 말하기 어렵지 않을까요.”

지난해 미국의 골프다이제스트에 의해 ‘올해의 코스 설계가’로 뽑혔던 그는 명쾌하게 자신의 설계 철학을 밝혔다. 아울러 자연미를 최대한 살리는 게 명문 골프장이 되기 위한 또 하나의 필수조건이라고 강조했다. 그래서 인터넷 홈페이지(www.dmkgolfdesign.com)에 적혀 있는 그의 모토도 ‘순수한 골프의 추구(Pursuing Purist Golf)’다.

“밴던 듄스의 설계를 맡았을 때 나는 27세였습니다. 내 목표는 스코틀랜드 풍의 링크스 코스를 건설하는 것이었는데 이게 쉽지 않았지요. 땅이 척박해 골프 코스 후보지로는 부적합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거든요. 그렇지만 나는 동료들과 함께 8개월간 이 땅과 씨름한 끝에 자연 환경을 최대한 살린 훌륭한 코스를 설계할 수 있었습니다.”

키드는 98년 ‘데이비드 맥레이 키드 골프 디자인’ 회사를 설립한 뒤 골프의 본고장인 스코틀랜드는 물론 미국과 남아프리카 공화국·피지 등에 15개의 코스를 설계했다. 밴던 듄스와 세인트 앤드루스의 캐슬 코스,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TPC샌프란시스코 베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팬코트 등이 그의 작품이다. 지난 11년간 15개 코스를 설계했으니 1년에 1개, 기껏해야 2개의 코스를 설계한 셈이다. 잭 니클라우스 등 PGA투어 출신 일부 선수가 1년에 10개가 넘는 코스를 설계하는 것에 비교하면 수가 무척 적은 편이다.

“다른 설계가를 비난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내 기준에 따르면 1년에 10개가 넘는 코스를 설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훌륭한 코스를 디자인하는 유일한 길은 그 땅을 이해하기 위해 충분한 시간을 투자하는 것입니다. 코스 설계를 맡기 전은 물론 설계를 진행하는 중에도 어떻게 코스를 만들고, 세분할 것인지를 염두에 두고 연구를 거듭하는 거지요.”

98년 밴던 듄스의 설계를 맡았을 때 그는 지형을 연구하기 위해 매일 18시간을 바쳤다. 세계에서 가장 자연스럽다는 평을 듣는 이 골프장은 역설적으로 가장 공을 들인 결과물인 셈이다.

그는 유명 코스 디자이너들이 설계를 맡았던 요즘의 최신 골프 코스는 한결같이 스테레오 타입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CAD 등 최신 기술을 이용하면 누구나 쉽게 코스 설계를 할 수 있는 탓에 평범하고, 아무런 영감도 주지 못하는 틀에 박힌 코스만 양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골프 코스 디자인은 매우 주관적인 예술이며, 현대의 기술을 옛 전통과 결합시킬 때 비로소 훌륭한 작품이 탄생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종이 위에 잉크만으로 그리거나 컴퓨터 스크린만을 이용한 설계만으로 위대한 코스를 탄생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그는 강조했다.

“골프 코스 설계는 10%의 ‘영감(inspiration)’과 90%의 ‘땀(perspiration)’으로 이뤄지는 겁니다. 발로 뛰지 않고 잉크만으로 그린 설계 도면은 쓰레기통을 찾아가게 마련이지요. 훌륭한 코스를 설계하려면 헌신과 노력 이외에 다른 지름길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밴던 듄스를 포함해 이제까지 그가 설계한 15개 코스 가운데 어떤 곳이 가장 마음에 드느냐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그는 난데없이 기자에게 “자녀가 몇 명이냐”고 되물었다.

“당신 자녀 가운데 누가 가장 예쁘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제 입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까지 제가 수천 번도 넘게 들어온 질문이지만 대답은 한결같습니다. 15개의 골프 코스 모두 내 자녀나 다름없기에 어느 쪽이 좋다, 나쁘다 말할 수 없습니다.”

키드는 최근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주변에 건설되는 골프장 설계를 맡아 또 하나의 마스터피스를 만들어 낼 준비를 하고 있다. 국내 기업이 인허가를 따내 개발하고 있는 이 골프장은 2011년께 완공 예정이다. 앙코르와트와 골프장이 어우러지면 어떤 코스가 나올까. 그는 “히스토리(역사)와 미스터리가 결합된 최고의 코스를 꿈꾸고 있다”고 말했다. 키드는 한국에서도 멋진 골프장을 설계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한국의 몇몇 골프장을 가봤는데 경관이 무척 아름답더군요. 한국의 자연미를 최대한 살린 독창적인 코스를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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