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티모르 30일 독립투표…진세근 특파원 르포1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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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딜리 (동티모르) =진세근 특파원]주민투표를 하루 앞둔 29일 동티모르 수도 딜리. 도시 전체가 주술에 걸린 것 같다.

보이는 것은 모두 '정지화면' 이고 무겁게 가라앉아 있다.

대낮에도 거리는 휑하게 뚫려 있다.

차를 타고 달리면 아주 가끔씩 사람과 마주칠 뿐이다.

오후 6시를 넘으면 그마저 자취를 감춘다.

텅빈 거리에 군데군데 유엔 깃발만이 꼿꼿하다.

'오늘 하루만 견디면 드디어 독립' 이라는 설렘은 두려움 속에 완전히 묻혀버린 느낌이다.

모두들 어깨를 움츠린 채 그늘 속으로만 숨어든다.

딜리 도착 첫날인 28일 안내를 맡은 베르투주 (29) 는 오후 5시가 넘자 "집에 가야 한다. 일을 그만 끝내자" 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오후 5시30분이 넘어서자 결국 말도 없이 사라졌다.

그만큼 밤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사흘전 격렬한 시가전 끝에 5명이 숨진 딜리 동부 쿨루훈 지역. 불탄 오토바이.부숴진 가옥.무너진 다리 등이 여전히 검은 연기를 피워 올리며 흉물스럽게 누워 있었다.

독립을 반대하며 인도네시아 통치 아래의 자치를 주장하는 민병대는 다리에 대검을 차고 사제권총으로 무장한 채 주변 지역을 활보했다.

점령지를 시찰하듯 당당해 보였다.

이들의 공격에 질려버린 주변의 메타 아라우조.옥타비오.도스 산토스.리모지역들은 유령도시나 마찬가지였다.

"무섭다. 언제 어디에서 총알이 날아올지 모른다. 투표가 끝나면 진짜 큰 싸움이 벌어질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다.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다. " 도스 산토스 지역에서 만난 에르메네 구이도 로바토 (45.어부) 의 주름진 얼굴에는 초조한 기색이 가득했다.

우리 경찰청이 파견, 2개월째 시민경찰로 근무 중인 안정호 (安定鎬) 경위는 "될 수 있는 대로 민병대를 만나면 사진을 찍지 말라. 언제 총을 겨눌지 모른다" 고 당부했다.

29일 일종의 '휴전협정' 이 발표됐다.

현 동티모르국민저항평의회 (CNRT) 의 전신인 프레틸린 (동티모르독립혁명전선) 의 군조직에서 발전한 파린틸 (동티모르민족해방군) 과 민병대간에 맺어진 것이다.

그러나 주민들 표정은 여전히 어둡다.

협정이 제대로 지켜질 것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속속 딜리를 떠나고 있다.

유엔동티모르파견단 (UNAMET) 은 27, 28일 이틀 동안 7백여명이 선박편을 이용해 딜리를 떠난 것으로 잠정 집계했다.

행선지는 딜리 앞바다에 촘촘히 박혀 있는 섬들이다.

투표 후에 발생할지도 모를 '내전' 을 미리 피하자는 심산이다.

이미 민병대들은 '전쟁' 을 선포한 상태다.

최대 민병조직인 아이타락 소속이라고 자신을 밝힌 질도 코스타 (34) 는 "투표 결과가 독립으로 나온다면 우리는 끝까지 싸울 작정이다. 그렇게 되면 동티모르는 피로 덮일 것이다. 모든 준비는 이미 끝났다" 고 말했다.

섬뜩한 광기마저 느껴졌다.

독립파 CNRT 딜리지부 행동대원인 페르난도 마누엘 (24) 은 "저들 (민병대) 은 마약을 먹고 있다" 고 말했다.

멀쩡하다가도 갑자기 미친 듯이 날뛰고, 공격할 때 술취한 듯 눈이 풀어져 있으며, 총을 겨눌 때 팔을 심하게 떤다며 그렇게 주장했다.

독립을 소망하는 동티모르 주민 중 상당수가 '자치 (Autonomy)' 라고 쓴 티셔츠를 입고 집 앞에 인도네시아 국기를 세우는 것도 그들의 공격을 피하기 위한 방책이란다.

'동티모르 분할설' 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점점 설득력을 얻고 있다.

투표 후 동티모르가 '동동 (東東) 티모르' 와 '서동 (西東) 티모르' 로 쪼개질 것이란 얘기다.

실제로 잔류파의 지도자 도밍고스 소아레스 전 동티모르 주지사는 최근 군중집회에서 동티모르 지도를 휘두르면서 "우리는 서티모르와 붙어 있는 5개 구 (區) 를 우리의 영토로 삼을 것" 이라고 선언했다.

동티모르내 13개 구 중 5개를 쪼개 잔류파의 본거지로 삼겠다는 얘기다.

소아레스는 "그러나 서쪽 5개구만으로는 모자란다. 옛날 베를린처럼 수도 딜리도 반으로 나눠야 한다" 고 고함을 질렀다.

그가 휘두른 지도는 딜리를 정확히 반으로 나눈 것이었다.

또다른 잔류파 지도자 티토 바티스타도 총격전 하루 전인 지난 25일 2천여명의 지지자들이 모인 가운데 딜리에서 열린 '인도네시아내 자치권확보를 위한 시민모임' 에서 " (투표에서) 이기건 지건 우리는 영원히 인도네시아와 함께 한다. 우리는 산악을 누비는 새로운 게릴라가 될 것" 이라고 선언했다.

인도네시아 정부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딜리내 마코타 호텔에서 만난 한 유엔관계자는 "인도네시아 정부가 선거참관단 추가 파견을 계속 고집하고 있다" 고 귀띔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이미 유엔파견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난 26일 3백50여명을 참관단 명목으로 파견했다.

'선거 후 내전' 을 대비해 인원을 충원하는 것이라는 의심을 일으킨 대목이다.

◇동티모르 현황

▶1975년 인도네시아에 강제합병

▶인구 약 80만명 (등록유권자 45만)

▶종교는 가톨릭

▶독립반대 민병대 8천~1만명 추정

▶독립투표유세기간 8월14~27일

▶75년 이후 분리독립과정 사망자 25만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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