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과거' 잊지않는 유대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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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간밤 당직실에 타전된 프랑크푸르트발 (發) 외신기사 두 개가 눈길을 끌었다.

하나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시 (市)가 독일계 유대인 지도자 이그나츠 부비스의 이름을 딴 '부비스 평화상' 을 제정한 것. 나치에 의해 아버지와 형제.자매가 모두 학살당한 부비스는 그 자신도 폴란드 유대인수용소에서 박해받았던 인물로, 지난 주 금요일 72세로 숨을 거두었다.

부비스는 신 (新) 나치에 의한 무덤훼손을 염려, 자신을 이스라엘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

독일의 저명인사들은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그의 장례식 참석을 위해 대거 텔아비브로 날아갔다.

페트라 로스 프랑크푸르트 시장은 "우리는 과거의 잘못을 잊지 않기 위해서도 그를 기억해야 한다" 며 평화상 제정 이유를 밝혔다.

또 하나는 유대인 단체가 나치의 대학살 당시 독가스를 생산했던 IG파르펜사 (社) 의 완전 도산을 요구했다는 기사다.

25년 설립된 독일 최대 화학업체였던 이 회사는 패전 직후 연합군에 의해 해체됐으나 아직도 스위스은행 비밀계좌에 24억달러 등 거액의 재산을 은닉해 놓은 것이 유대인들의 추적 끝에 드러났다.

IG파르펜의 대주주들은 50년대 초 1천6백만달러의 보상금을 지급했던 사실을 상기시키며 이번에 다시 1백60만달러의 보상금을 제의했으나 한마디로 거절당했다.

AP통신은 생존 유대인 수백명이 노예노동과 대학살의 책임을 물어 거액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으며, 다음주 중 미국의 스튜어트 에이젠스타트 재무부차관의 중재 아래 IG파르펜과의 협상이 시작될 것이라고 전했다.

과거를 잊지 않으려는 독일, 그럼에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유대인들. 불과 이틀 전 한.일 양국의 풍경과는 놀랄 만큼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우리 정부는 "과거사 문제는 지난해 한.일 정상회담에서 매듭지어졌다" 고 되뇌고, 일본 열도에는 이날 일장기가 펄럭이는 가운데 기미가요 제창이 전국을 뒤덮었다.

이철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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