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485.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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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제10장 대박

그러나 기겁을 하고 놀라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순식간에 흉기를 뽑아 든 변씨 스스로 가슴이 뜨끔하도록 놀랐을 뿐, 두 사람은 전혀 질린 기색이 아니었다.

흉기를 다루는 솜씨라면 사내의 편력이 오히려 다양하고 능숙했다. 차마담 역시 그런 흉기의 위협에는 신물나도록 단련된 여자였기 때문에 시골 철물점에서 구입한 작은 식칼 정도는 위협적인 것은 고사하고 장난감 같은 손톱깎이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하품나게 놀고 있네 정말. " 그렇게 비아냥거리며 같잖다는 듯 입귀를 삐쭉한 것은 차마담이었다. 정말 차마담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러나 흉기를 뽑아들었을 때, 두 사람 중에서 어느 한 사람만이라도 새파랗게 질려 살려달라는 외마디 소리를 내질렀거나, 흉기 자체에 대한 두 사람의 반응이 어떤 식으로든 심각했었더라도 변씨가 자제력을 발휘할 수 있는 말미가 있었을지 몰랐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 두 가지 모두가 빗나가고 말았던 것이 폭력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데 성공한 셈이었다. 그를 꼰대나 늙은이로 불러 자존심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었지만, 변씨로선 건설현장의 청부 폭력배로 배짱과 완력을 키워 온 관록이 깡그리 퇴색된 것은 아니었다.

하품나게 놀고 있다는 마지막 한 마디가 변씨의 자제력을 내동댕이쳐 준 셈이었다. 변씨는 그때까지 잡고 있던 이불깃 한 쪽을 비장한 결의를 보이며 낚아챘다. 차마담의 고깃덩어리 같은 나체가 전등불 아래로 드러났다.

그 육덕이 시선에 들어오는 순간, 벌떡 몸을 일으킨 변씨는 그녀의 등줄기를 겨냥하고 몸을 날렸다. 그 순간, 외마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 왔다. 위협으로만 끝날 줄 알았던 변씨가 실제로 폭력을 행사하는 순간, 비로소 사내는 자신의 방만에 아뿔싸한 것이었다.

그도 몸을 날려 변씨를 덮치면서 식칼 든 팔을 잡고 뒤로 꺾었다. 변씨의 입에서 외마디 소리가 들렸다.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들린 것과 때를 같이해 변씨의 다른 손이 흉기를 낚아채고 있었다.

차마담도 외마디 소리를 질렀지만, 홑이불로 얼굴이 덮여 있었기 때문에 복도 밖까지 들리지는 않았다. 세 사람은 한동안 한데 엉켜 빼앗고 버티고 뿌리치는 몸부림을 계속했다.

그러나 난동의 결과는 예측했던 대로 나타나지 못했다. 사내에게 짓눌려 있던 변씨가 상반신을 뒤척이는 순간, 휘둘렀던 식칼은 벌써 사내의 허벅지에 깊숙이 꽂히고 말았다.

허벅지를 양 손으로 움켜진 사내가 황소 영각 켜는 소리를 내지르며 바람 벽에 뒤통수를 찧으며 나뒹굴었다. 비닐장판 위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사내를 응급처치할 수 없었다. 외마디 소리를 내지르는 사내의 깡마른 몸뚱이가 뒤로 벌렁 쓰러지는 순간, 차마담은 방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혼절해 버렸고, 흉기를 내던져 버린 변씨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복도를 나선 그는 호흡을 고르며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가다듬고 싶은 호흡은 더욱 가팔라졌고, 비로소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계단을 내려왔으나 접수처의 젊은이는 이미 자취를 감추고 보이지 않았다.

마스터키를 건네 주었다면, 그 방에서 일어날 불상사를 예측하기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키를 건네 준 동기 부여가 걱정되었던 젊은이는 변씨가 계단으로 오르는 것을 확인하고 일찌감치 자취를 감춰 버린 것이었다.

현관을 나선 변씨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힐끗 모텔 3층으로 시선을 던졌다. 방에는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다.

그러나 사태를 빚은 흔적을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조용했다. 모텔 모퉁이를 왼손편으로 돌아가면 잡초가 무성한 공터가 자리잡고 있었다. 곳곳에 이웃집에서 내다 버린 쓰레기들이 쌓여 있었다. 쓰레기더미 곁에 그는 풀썩 주저앉았다. 그만한 일로 기력까지 소진되다니. 그는 혼자 피식 웃었다.

그때서야 영동식당 묵호댁이 생각났다. 호젓한 지름길을 찾아 영동식당에 이르렀을 때, 전신에는 땀이 비오듯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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