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발족해 37년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된 조선소년군(보이 스카우트)을 만든 조철호(1890~1941). 그는 단원들에게 항상 “너희들은 이 민족의 화랑이다. 민족을 일깨우는 선봉이 되어라”고 훈유했다 한다. [독립기념관 소장]
“내가 소년군 발기에 뜻을 둔 것은 5년 전인 1919년이다. 1차 세계대전 대포격에 잠을 깨어 베르사유 궁전에서 열린 파리강화회의와 보조를 같이 하였다.” 소년의 개조가 민족의 개조임을 확신한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사 조철호는 그해 10월 5일 ‘조선소년군’을 창설했다. “먼저 사람이라는 그 자체의 개조로부터 시작하여 이 사회의 모든 허식과 악습을 바꾸고자 함입니다. 그러함에는 사람의 시초인 소년의 개조에 착수하여 그들로 하여금 사회를 위하고 자기를 위하기에 최적절한 자각과 시련을 갖게 하고자 함이외다.” 1909년 군사 유학생으로 일본에 갔던 그와 동기생들은 망국의 비보에 접해 “기왕 군사교육을 배우려고 왔으니 끝까지 배워 임관한 다음 중위가 되는 날 모두 탈출하여 광복운동에 나서자”는 데 뜻을 모았다. 1913년 일본육사를 함께 졸업한 지청천은 독립군이 되었고 홍사익은 전범재판의 희생양이 되었지만, 그는 3·1운동을 계기로 국민국가를 만들기 위한 터 닦기 작업인 소년운동에 몸을 던졌다. 1926년 6·10만세 운동에 깊이 간여한 그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간도로 몸을 숨겨 교편을 잡았지만, ‘산에 사는 까마귀야 시체 보고 우지 마라 몸은 비록 죽었으되 혁명정신 살아있다’는 노래를 부르다 조선독립을 외치며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는 제자의 기억마냥 독립에의 열망은 식을 줄 몰랐다. 보성전문학교 교련교관으로 근무하던 1941년 봄. 그는 “나는 일을 다 하지 못하였는데”라는 말을 남기고 미처 다 펼치지 못한 큰 나래를 접었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