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NA] 의(衣)·식(食)·주(住)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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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가 발전하면 가장 먼저 변하는 게 있다. 바로 민생의 바로미터인 의(衣)·식(食)·주(住)다. 건국 60년 동안 중국의 의식주 또한 다양한 발전을 경험했다. 중국이 목표로 하는 ‘전면적인 소강사회(小康社會, 중국의 전체 인민이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고 약간의 문화생활까지 향유할 수 있는 사회)’ 건설이 진전을 보임에 따라 중국의 의식주는 앞으로도 많은 변화를 겪을 것이다.

인민복 패션서 명품 고객으로

1980년대 초까지 중국인의 복장은 ‘2종(種) 3색(色)’이었다. 군복·인민복이란 두 가지 종류에, 회색·남색·흑색의 세 가지 색깔이 전부였다. 디자인 개념도 없어 옷을 만든다는 것은 재봉을 의미할 뿐이었다.

개성 없는 인민복은 78년 개혁개방과 함께 베이징을 찾았던 외국인의 눈에 “파란색 개미떼”로 보였을 정도였다. 옷만 봐서는 남녀 구분도 어려웠다고 한다.

인민복 일색의 복장 문화는 79년 4월 국무원이 투자비는 적고 효과는 빠르며 경험 축적이 많은 경공업, 특히 의류업 집중 육성 계획을 발표하면서 전기를 맞았다.

이듬해 발간된 중국의 첫 패션 잡지 ‘스좡(時裝)’은 13억 중국의 의상 문화를 개화기로 이끈 기폭제였다. 천편일률적인 옷에 염증을 느낀 대중은 계간지인 스좡이 제시하는 스타일에 환호했다.

당 지도부도 앞장서 복장 개혁을 이끌었다. 후야오방 총서기는 80년대 초 “인민이 멋지게 보이도록 의류업을 진흥시켜야 한다”며 업계 관계자들을 독려했다. 87년 11월 자오쯔양 총서기는 공산당 회의석상에 암청색 양복을 입고 나와 전 세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80년대 중산복 일색이던 남성복은 양복으로 분화했다. 여성들은 색상이 강렬한 치마 패션에 열광했다. 몰개성한 집단 복장을 벗게 되자 개인에 대한 자각이 패션을 통해 분출한 것이다.

지난 10년간 고도성장 가도를 달려온 중국은 이제 세계 명품 패션계가 가장 주목하는 소비시장이다. 베이징·상하이에선 하루가 멀다 하고 살바토레 페라가모·구찌·펜디 등 명품 브랜드의 대형 패션쇼가 열리고 있다.

16년 전까지 음식도 통제

먹는 일을 하늘로 치는(民以食爲天) 중국인들에게 지난 60년의 먹거리 변화는 상전벽해였다. 1953년 당 중앙은 ‘양식 총괄 구매·소비에 관한 결의’를 발표했다. 계획경제가 출범한 그해 중국에서 소비 물자는 절대 부족 상태였다. 곡류·고기·식용유를 살 때는 양표(粮票)·육표(肉票)·유표(油票)가 있어야 했다. 직물을 살 때는 포표(布票)가 필요했다. 이런 생필품 판매처인 양점(粮店)에서 주민등록에 오른 호구마다 각종 표를 나눠줬다. 호구관리가 양점을 통해서도 이뤄지던 때였다. 따라서 이사를 하거나 출장을 가게 되면 소속 양점의 변동이 뒤따른다. 이를 일컫어 ‘양식 관시’라고 불렀다. 이 관시가 없으면 굶을 수밖에 없었다. 생선 한 마리를 사려고 아침부터 줄을 서도 못 사고 돌아오던 때가 더 많았다. 주말 또는 월말 양표가 발급되는 날이나 생필품이 배급되는 날 길게 줄을 선 모습은 사회주의 중국을 상징했다.

‘밥표’를 통해 식재료를 구하다보니 푸짐한 식탁은 늘 꿈이었다. ‘추량(粗粮·거친 양식)’이라고 부르는 옥수수·수수 등으로 죽을 끓여 먹었고 쌀밥은 일주일에 한두 번이 고작이었다.

전국 단일 가격이었던 양표는 85년 지역 양식기관이 확보한 물자 재고량에 따라 변동 가격제로 바뀐다. 지역마다 가격차가 나면서 양표가 화폐 기능을 갖게 됐다. 개혁개방 조치로 물자 생산이 늘면서 물물교환에 나서는 인민들이 많아졌다. 화폐처럼 쓰였던 양표 유통도 급증했다.

93년 시장경제가 자리 잡으면서 계획경제의 대명사였던 양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더 이상 당 중앙에서 먹고 사는 일정과 규모를 통제하기 어려운 시대상의 반영이었다.

집을 사고 판 지 불과 10년 안 돼

‘팡누’(房奴)’는 부동산 이슈와 관련해 중국 신문에 자주 오르내리는 말이다. 주택 대출금 상환 부담에 짓눌려 옴짝달싹 못하는 서민들을 집의 노예로 빗댄 신조어다. 2000년대 고도 성장의 광풍이 가장 거세게 몰아쳤던 분야 중 하나가 부동산 개발이었다.

전국적으로 아파트 투기 바람이 일었다. 철거와 도시 재개발을 뜻하는 ‘차이첸’ 열기가 사회를 들끓게 했다. 오래된 집들을 헐고 반듯하게 정돈된 택지 지구엔 초고층 아파트가 세워졌다. 베이징과 상하이에서는 아파트를 한두 동(棟)씩 사재기하는 일이 예삿일처럼 벌어졌다. 요즘엔 차이쳰 물결이 비껴간 ‘사합원’(四合院·전통주택)이 1㎡당 5만 위안(약 1000만원)을 넘나들 정도로 거품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 주택이 사고 파는 상품이자 소유의 개념 속에 들어온 것은 불과 10여 년밖에 안 됐다. 1998년 주룽지 총리 시절 주택분배제도가 폐지됐다. 주택을 상품으로 전환시킨 이론적 토대는 일찌감치 닦아놨었다. 80년 1월 당 이론 잡지인 훙치(紅旗)는 “집은 소비재이자 상품이다. 사유주택과 사회주의 공유제 사이엔 모순이 없다”고 못 박았다.

주룽지가 나서기까지 주택은 대부분 국가와 각급 단위가 제공하는 ‘배급품(福利房)’이었다. 주택정책은 개혁개방 이후 사회 전 부문으로 확산된 시장경제의 그물망 밖에 있었다. 서민 생활 안정에 끼치는 주거의 절대적 영향력 때문이었다. 배급제 시대엔 도시 거주 3인 가족의 평균 주거 면적은 13㎡였다. ‘거즈롱(비둘기 새장)살이’라는 말이 유행어였다. 이런 배급 주택은 2002년을 끝으로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증언하는 유물이 됐다.

정용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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