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라길.낙성대길…쓰레기 뒤덮인 '걷고싶은 거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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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17일 오후 2시쯤 서울 종로구 종묘 정문에서 서쪽 담벼락을 따라 조성된 순라길. 이 길은 지난 95년 6월 서울시와 종로구가 옛모습을 복원, 시민 휴식공간을 제공하고 역사문화 의식을 높이겠다며 만든 '역사문화 탐방로' 다.

도로를 넓히고 보도블럭 교체.나무 식재 등에 무려 26억원이 투입됐다.

하지만 이곳에서 선조들의 역사.정취나 종묘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느끼기란 불가능하다.

탐방로 복원 사업으로 넓어진 보도는 인근 귀금속 상가에 음식을 배달하는 20곳의 식당들이 점령해 버렸다.

보도 위에서 설겆이를 하고는 오수를 그대로 버리는가 하면 배추를 다듬는 등 음식 조리도 예사다.

보도를 걷는 행인들은 없다.

모두 일방통행인 차도를 이용하지만 그 또한 쉽지 않다.

곳곳에 불법 주차된 차량들을 피해다녀야 하고 인근 주민들이 내다버린 쓰레기와 헌 가구가 걸음을 방해한다.

순라길의 역사와 의미에 대해 써 놓은 안내간판 조차 쓰레기와 불법 주차 차량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주변 주민들 외에는 그곳이 많은 돈을 들여 만든 역사탐방로인 사실조차 모를 정도다.

주민 高모 (62) 씨는 "길이 저 지경이 될때까지 단속 한번 제대로 하는 것 못봤다. 관 (官) 이 제 돈 쓴 것 아니라고 '내 몰라라' 하는 꼴" 이라며 한심해 했다.

관악구가 최근 공사를 마무리한 1.1㎞의 낙성대길 (낙성대 입구~서울대 후문) 도 '획일적 전시행정의 표본' 이라는 지적이다.

관악구는 이 곳을 '걷고 싶은 거리' '문화의 거리' 로 만들겠다며 지난해 7월부터 공사를 벌여 도로를 넓히고 보도블럭을 새로 깔았다.

또 수십년된 아름드리 은행나무와 개나리를 모조리 뽑아내고 잎도 몇개 달려 있지 않는 묘목을 가로수라며 심어놨다.

이에 대해 인근 주민들은 "낙성대의 운치와 풍경을 망쳐 놓은 것" "가만 놔 뒀으면 최소한 욕은 먹지 않았을 것" 이라며 불만을 터뜨린다.

인근 주민 김광현 (金光顯.48) 씨는 "뭐하는 공사인가 지켰봤더니 거리를 엉망으로 만들어 놨다" 며 "콘크리트와 보도블럭으로 뒤덮인 거리가 걷고 싶을 리가 있겠는가" 라고 반문했다.

['악순환 피하기' 대책없나]

◇ 현황 = 서울시는 지난해 7월부터 '걷고 싶은 거리 만들기' 사업을 추진 중이다.

92년 정부와 서울.부산 등 지방자치단체에서 시행했던 '문화의 거리' '역사 탐방로' 조성 사업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번 사업은 시 시범가로 3개.자치구 시범가로 25개 노선과.차없는 거리.역사문화 탐방로 조성 등 6개 분야로 나뉜다.

전체 사업비는 모두 1천1백여억원으로 올해만 2백40여억이 투입된다.

시범가로.탐방로 조성 등 대부분의 사업은 올해 설계를 마친뒤 내년부터 시공에 들어갈 예정이다.

특히 시는 각 자치구에 사업비의 30~50%에 해당하는 2억5천만원의 특별교부금을 지원한다.

◇ 문제점 = 시민단체.도시환경 전문가들은 '쾌적한 보행환경 제공' 이라는 취지에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범가로 선정이 지역 특색에 대한 분석 없이 행정기관의 편의적 발상에 따라 획일적으로 이뤄져 '돈만 낭비한 걷고 싶지 않은 거리' 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고 지적한다.

강동구 암사동~송파구 방이동간 4.6㎞의 보행로 개선사업이 대표적 사례. 일부 구간은 보행자가 거의 없어 관할구청 조차 "쓸데 없는 낭비" 라는 지적을 서슴지 않고 있다.

이는 지역주민의 의견을 전혀 수렴하지 않고 교통체계 등에 대한 고려없이 설계.시공을 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현재 설계작업에 들어간 대부분의 사업은 상당 부분 수정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종로 2~3가의 8차선 차도를 6차선으로 줄여 보도를 넓힌뒤 각종 휴식공간을 마련하겠다는 '걷고싶은 종로 만들기' 의 경우 설계작업은 이미 끝났다.

그러나 차도 축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도심교통체계 개편안이 올 연말께나 나올 예정이다.

다시 설계를 변경해야 한다는 얘기다.

보도블럭 교체.휴식공간 마련 등 겉치장 뿐 아니라 옥외광고물.지하시설물.교통체계 개편 등이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

그러나 종합적인 검토는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도시계획국.문화관광국.주택국.교통관리실 등이 따로따로 사업을 추진하는 것도 졸속의 요인이다.

형식상 도시계획국이 사업을 총괄하는 것으로 돼 있지만 시는 내부문건을 통해 "도시계획국이 행정.재정적 권한이 없어 관계부서간 긴밀한 협조와 조정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고 고백하고 있다.

◇ 대책 = 전문가들은 서울시가 "뭔가 보여 주기 위해 너무 서두른다" 고 지적한다.

전시행정이 되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 시 관계자는 "앞으로 관계 부서간의 정기 협의체를 구성하고 시민단체의 참여와 공청회 등을 통한 시민의견 수렴에 적극 나서겠다" 고 밝혔다.

또 자치구에 획일적으로 분배하는 예산도 경쟁 체제를 도입, 구별 지원금에 차등을 둘 방침이다.

그러나 부서간 경쟁을 조율하지 않는다면 한가지 일을 몇번이나 되풀이하는 악순환은 고쳐지지 않을 것이다.

김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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