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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을 기다리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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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흔히 ‘새털’같이 많은 날이라고 잘못 쓰기 십상이지만, 셀 수 없이 많은 것을 비유하는 말은 ‘쇠털’이 바른 표현이다. 다여우모(多如牛毛)란 한자성어를 보면 그렇다. 아무렴, 덩치 큰 소가 새보다는 털이 더 많지 않겠는가.

그럼 ‘쇠털’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그건 봉모(鳳毛) 즉 봉황의 털이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봉황의 터럭이라니, 구경조차 한 사람이 없을 만큼 귀한 존재를 일컫는 말이다. 한술 더 뜬 표현이 봉모인각(鳳毛麟角)이다. 역시 상상 속 동물인 기린(麒麟)의 뿔을 갖다 붙인 것이다.

봉모인각은 귀하다는 의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좀처럼 보기 드문 출중한 인재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기린아’란 표현도 재능이 특출한 젊은이를 뜻한다. 두보(杜甫)는 서경이란 사람의 두 아들을 보며 ‘공자와 석가가 친히 보내주셨으니, 두 사람 모두 천상의 기린아로세’(孔子釋氏親抱送倂是天上麒麟兒)란 시구를 남겼다. 요즘 유행하는 ‘엄친아’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찬탄이다. 두보의 아들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을지 상상이 간다.

고대 중국의 문헌에 나타나는 기린은 사슴의 몸통에 소의 꼬리, 말의 발굽과 갈기를 달고 이마에는 뿔이 돋아 있다. 특별히 목이 긴 짐승이란 기술은 없다. 아프리카 초원의 기린이 대륙을 건너 중국 땅에 도달한 것은 아프리카까지 원정을 갔던 명나라 정화(鄭和) 함대가 영락제에게 바친 것이 처음이다. 처음 보는 동물의 자태에 감탄한 황제가 영물이라 생각하여 기린이란 이름을 붙였는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지금 중국에서는 기린이라 부르지 않고 장경록(長頸鹿), 즉 목이 긴 사슴이라 부른다.

1973년 경주 천마총에서 발굴된 천마도가 엊그제부터 일반인에 공개·전시되면서 논쟁거리가 불거졌다. 육안으로는 안 보이지만 적외선 카메라로 촬영해 보니 뿔이 선명한데, 그렇다면 그림의 주인공은 말이 아닌 기린이란 것이다. 말이든 기린이든 신라인의 숨결이 어린 국보의 가치가 변하는 건 아니겠지만, 이참에 정체를 정확하게 밝혀내면 좋겠다.

고대인들은 아무 때나 기린을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성군이 출현해 어진 정치를 펼칠 때에야 비로소 기린이 나타난다고 믿었다. 신라 화공이 그린 게 기린이 맞다면 성군의 출현을 기다리는 소망이 담긴 작품으로 봐야 할 것이다. 150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 소망엔 변함이 없다.

예영준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