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 대기자의 투데이] 미국의 이기주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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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국가이기주의라는 말이 있다면 미국이 한국의 중거리 미사일 개발에 반대하는 핑계야말로 국가이기주의적이라고 하겠다.

미국은 네가지 핑계를 가지고 한국의 미사일 능력을 3백㎞ 아래로 묶어두려고 한다.

첫째, 한국이 사정거리 3백㎞ 이상의 미사일을 개발하면 북한의 미사일 개발을 억제하려고 하는 미국의 전략에 차질이 온다.

둘째, 한국이 그런 미사일을 개발하면 중국과 일본을 자극해 동북아시아에서 군비경쟁이 벌어진다.

셋째, 북한의 미사일 위협에는 한.미 군사동맹으로 충분히 대처할 수 있다.

넷째, 한국은 범세계적으로 미사일 확산을 막으려는 미국의 정책에 협조해야 마땅하다.

이기주의를 뒷받침하는 논리가 논리적일 수 없다.

북한은 한국이 3백㎞ 이상의 미사일을 갖거나 말거나 미국 본토까지 사정거리에 두는 장거리 미사일 개발을 서두르고 있다.

한국의 미사일 개발은 미사일통제기구 (MTCR) 라는 국제적인 룰에 묶여 있지만 북한은 국제적인 룰 따위는 안중에 없다.

중국이 외부의 자극으로 군비를 강화하고 그것이 일본의 군비 강화를 촉발하는 일이 있다면 그 자극은 미.일 군사동맹 강화와 일본의 재무장 같은 것이지 한국의 5백㎞ 미사일은 아닐 것이다.

중국은 핵탄두와 장거리 미사일을 보유한 나라다.한국의 단거리 미사일이 중국에 실질적인 위협이 될 수 없다.

일본의 미사일 역시 사정거리는 3백㎞ 이내에 머물러 있어도 성능은 최고수준이다.

한.미 군사동맹으로 북한의 미사일 위협에 대처하자는 말은 너무 노골적인 대국주의적 발상이요 '큰형 신드롬' 이다.

동맹국에 대한 미국 정부의 방위공약 이행은 항상 의회의 견제를 받는다.

그래서 미국의 군사지원은 결정적인 순간을 놓칠 수 있다.

'우리만 믿으라' 는 말은 믿을 수 없다.

한국이 미국의 미사일 확산 저지정책에 협조하는 데도 조건이 있어야 한다.

최소한의 자위수단을 갖추는 것이 그런 조건이다.

한국은 언제까지 미국의 세계정책의 제단에 제물 (祭物) 노릇을 해야 하는가.

지난해 여름 일본열도의 머리 위로 중거리 미사일을 날린 북한은 미국 하와이와 알래스카에까지 미치는 대륙간 장거리 미사일을 개발하고 있다.

거기에 비하면 한국이 개발하기 바라는 5백㎞ 미사일은 장난감이다.

다만 5백㎞면 북한의 거의 전역을 커버하기 때문에 대북 억지력이 되는 것이다.

한국의 입장이 정당함에도 불구하고 역대 정부들이 미국에 3백㎞ 이상의 미사일 개발에 대한 동의를 구하지 않았던 것은 그것이 껄끄럽고 부담스러운 문제여서 다른 문제로 미국의 협조를 구할 일이 많은 처지에서 뜨거운 감자는 피해가자는 생각에서였다.

거기에 북한을 자극하지 말자는 심리도 작용했다.

서해사태를 계기로 한.미 정상회담에서 5백㎞ 미사일 문제가 처음으로 제기된 것은 전화위복이다.

서해사태와 금강산 관광객 억류 사건, 그리고 비료회담 결렬로 국민의 신뢰를 잃은 햇볕정책의 기조를 살리는 길은 5백㎞ 미사일 개발 같은 구체적인 안보태세의 강화와 협상카드의 확보다.

그렇지 않고는 햇볕정책이 여론의 지지를 회복할 수 없을 것이다.

북한 전역을 사정권에 두는 한국의 미사일 개발에 걸려 넘어질 정도의 한.미 안보협력과 대북정책은 건전한 정책이 아니다.

남북한의 미사일 불균형 상태는 북한의 도발적인 자세와 벼랑끝 전술의 원인이 된다.

그것은 북한의 강력한 협상카드이기도 하다.

미국은 한국이 중거리 미사일을 보유해 북한에 대해 최소한의 저항능력 (Deniability) 을 갖는 것이 당장 한반도의 안정을 위해 필수적일 뿐 아니라 장기적으로는 동북아시아의 세력균형에도 도움이 된다는 사실에 늦기전에 눈을 떠야 한다.

북한 미사일의 성능이 월등하다고 해도 우리측 미사일이 북한 전역을 겨냥한다면 북한의 군사적인 모험에 대한 효과적인 억지력이 된다.

이것은 우리 안보의 질적 도약을 의미하는 것이다.

김영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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