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재도전] 1. 태국…생기찾은 '바트경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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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우리에게 국제통화기금 (IMF) 금융지원이란 엄청난 충격을 안겨줬던 아시아 외환위기. 그 환란의 단초는 97년 7월 2일 터진 태국 바트화 폭락사태였다.

이후 도미노처럼 번진 외환위기로 한국을 포함, 아시아국가 대부분이 기업도산과 물가고.실업난에 허덕였다.

2일로 만 2년을 맞았지만 당시의 여진은 여전히 깊은 상처로 남아 있다.

그러나 각국은 개혁의 기치 아래 뼈를 깎는 구조조정으로 힘차게 재도약을 시도하고 있다.

각국은 위기를 어떻게, 얼마나 이겨냈는지, 또 아시아 기축경제국인 일본과 중국은 회복되고 있는지 생생한 현장취재를 통해 점검해본다.

6월 12일 오후 2시. 방콕 동쪽 50㎞지점의 8차선 고속도로 공사 현장. 수십대의 굴착기.기중기가 토해내는 굉음 때문에 귀를 막고 다녀야 할 정도다.

97년 IMF행이 결정되면서 전면 중단됐던 촌부리 공단 조성 및 80여㎞의 연결 고속도로 공사가 최근 재개되며 활기를 되찾았다.

이 공단은 "동남아 최고의 외국인 투자공단을 만들겠다" 며 태국 정부가 야심작으로 추진했던 곳. 공사가 중단됐던 1년반 동안 고향에 내려가 농사를 짓다 다시 왔다는 근로자 왓타나 피티샘 (31) 은 연신 땀을 훔치면서도 "하루 3백바트 (약 1만원) 의 일당을 다시 받게 돼 몸은 힘들어도 신바람이 난다" 며 웃는다.

11일 오전 방콕의 금융 중심가인 룸피니 와이어레스 거리의 애킨슨 (億金) 증권사 객장. 시세판이 주가상승을 알리는 빨간색으로 바뀔 때마다 객장에 발 디딜 틈 없이 몰려든 4백여명의 투자자들은 일제히 "오호, 헤 (야호)" 하며 환호성을 질러댄다.

호주머니에서 계산기를 꺼내 두들겨보던 주부 시리펀 와노타얀 (43) 은 "남편 소득은 2년 전 그대로지만 주식 때문에 생활에 조금 여유가 생겼다" 며 주식으로 번 돈으로 샀다는 '샤넬' 핸드백을 들어보였다.

병원 사무직 직원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위앗 데차아난 (45) 은 "IMF사태 이후 204까지 떨어졌던 주가 (SET지수)가 최근 524까지 뛰었다" 며 "직장인치고 요즘 주식투자 하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다" 고 말했다.

꼭 2년 전인 97년 7월 2일. 바트화가 하루새 20%나 폭락하며 태국 경제는 구렁텅이에 빠졌고, 이는 곧 아시아와 세계 금융위기의 서막이었다.

태국은 말 그대로 국가부도 상황이었다.

그러나 지금 태국 경제는 언제 그랬느냐는듯 완연한 회복세다.

제2금융권의 58개사 가운데 무려 56개사를 한칼에 날려버리는 등 정부의 과감한 개혁조치와 함께 35억달러 규모의 경기부양책이 효력을 발휘한 결과다.

재무부 경제재건기획정책국의 솜차이 국장은 "경제가 회복되면서 IMF와의 정책합의 의무를 면제받았다" 며 "이는 2년만에 '경제주권' 을 되찾은 것" 이라고 자신감을 내보였다.

국제투기자본에 의한 외환위기 재발 가능성 역시 "바트화 구조가 튼튼해져 문제없다" 고 한다.

구조조정을 통한 기업부문의 변화도 한국과의 공통점. 11일 오후 방콕 외곽의 사투푸라딧로드. 태국 최대 소비재 업체인 파타나피블 그룹의 분키아 초크와타나 사장은 허름한 공장 한쪽 4평 남짓한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었다.

"구조조정에 앞서 본보기 차원에서 사무실을 공장으로 옮겼다" 는 것이다.

그는 "경제위기 직후 '마마' (인스턴트 라면) 를 제외한 모든 제품 판매가 40% 가량 곤두박질쳤다" 며 "그룹내 자회사 수를 3백개에서 2백개로, 인력을 7만명에서 6만5천명으로, 근로시간을 주 48시간에서 40시간으로 줄이는 등 대대적인 군살빼기에 나섰다" 고 말했다.

그렇다고 태국 경제가 장밋빛 일색은 아니다.

가장 큰 골칫거리는 늦어지는 은행구조조정. 한국과 달리 구조조정을 철저히 은행 자율에 맡긴 결과다.

40대 중반의 한 은행 간부는 "대형 부실은행 중 하나인 타이 밀리터리 뱅크는 군부가 44%를, 샴 (SIAM) 상업은행은 국왕재산관리국이 28%의 지분을 각각 갖고 있지만 이들이 협조하지 않고 있어 정리할 방법이 없다" 고 하소연했다.

공기업 민영화도 벽에 부닥쳤다.

태국 정부는 외국인 소유까지 허용하겠다는 입장이지만 "경제주권 훼손, 대량해고 발생, 서비스 요금 인상 등이 불 보듯 훤하다" 며 노조가 강력히 반발해 성과는 거의 없다.

방콕.촌부리 = 김현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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