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형조 교수의 교과서 밖 조선 유학] “마음을 파고들지도 버려놓지도 마라, 그저 바라보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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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호 08면

정유일은 직접 곁에서 배우고 싶어했지만 퇴계는 난색을 표했다. 청량산과 근처 암자에는 조카와 손자, 선비 두엇이 머물고 있었고, 또 겨울이라 얼음과 눈에 막혀 왕래가 불편했던 것이다. 퇴계는 말한다. “무엇보다 내게 와서 배울 것이 없습니다.” 역시 공부는 스스로 깨닫고 홀로 밀고 나가는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퇴계, 그 은둔의 유학<10>-호랑이에게 물리지 않으려면

도학의 병
정유일은 당시 ‘도학(道學)의 병’을 앓고 있었다. 그는 건방지게도(?) 절대(理)와의 대면을 “1~2년 안에 끝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퇴계는 혀를 찬다. “이 일은 종신(終身), 평생의 사업(事業)입니다. 공자 문하의 뛰어난 제자인 안자, 증자도 아직 일을 마치지 못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보다 하질들이야 어떻겠습니까.” 목표가 험준하고, 마음은 조급한 데서 마음의 병이 자리 잡는다. 퇴계 자신이 이 병에 깊이 골병 든 바 있다. “저도 예전에 호랑이에게 물렸던 적이 있습니다.” 호랑이의 이빨 자국과 후유증은 그의 평생을 따라다녔다. 잘못을 깨닫고 약을 써서 나아지긴 했으나 그때쯤엔 나이가 들어 공부에 전력하지 못하고, 이런저런 노쇠 징후에 시달린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퇴계는 젊은 선비 정유일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자신의 처방을 들려준다. 놀랍게도 조언의 내용은 “마음의 수련을 하지 말라”였다. “지금 만약 마음에 직접 손을 써 이 병을 제거하고자 한다면 그럴수록 혼란과 동요가 심해질 것이고, 마침내 돌이킬 수 없는 큰 병으로 자리 잡을 것입니다.” 공부에 두 가지 병이 있다.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억지 탐색(强探索)’이다. 보이지 않는 그를 향해 허공을 찔러 대고, 혹은 땅 어디 있을 보물을 향해 중구난방 드릴(穿鑿)을 뚫어서는 안 된다. 또 하나는 ‘한가한 퍼즐 맞추기(閑按排)’다. 이 말은 옛적의 개념과 어법들을 자신의 테이블 위에서 다시 배치하고 조정하는 일을 가리킨다. 이 충고는 지금도 새롭다. 억지 천착을 멈추어야 학문이 실효를 얻고, 안배의 트랩을 벗어나야 새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다.

放下의 법
퇴계는 정유일에게 주자학의 격식을 깨고, 자신만의 비방을 들려준다. “조존(操存)과 성찰(省察) 공부도 그만 잊어라!” 물론 안다. 퇴계는 이 방하(放下)의 법이 주자학의 커리큘럼에 있지 않다는 것을…. “조존과 성찰을 아예 염두에 올리지 말라는 내 권고는 물론 학자들의 평상 처방이 아닙니다(操存省察不上念之說, 非謂學者常法爲然).” 그럼에도 퇴계가 이 격외(格外)의 방법을 권한 것은 호랑이에게 물린 데는 다른 약이 없기 때문이었다. ‘마음의 병(心恙)’이 대체 무엇인지 궁금하실 텐데, 이 질환은 지금의 용어로 하면 아마도 수도인들이 잘 걸린다는 ‘상기(上氣)’와 비슷한 것일 거라고 짐작한다.

퇴계는 이 병에 치료법이 달리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내려놓는 수가 있을 뿐이다. 초월을 향한 무작한 열망을 내려놓고, 그 실현을 위해 ‘뚫어 대던’ 훈련들도 그만 작파하는 것. 참고로, 주자학은 마음의 훈련으로 두 가지를 제시한 바 있다. 1) 조존은 마음이 대상과 교섭하지 않을 때 그 순수한 본체를 유지하는 것이고, 2) 성찰은 대상과 교섭한 이후에는 그 발현의 적절성을 점검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퇴계는 정유일에게 도학(道學)이 권하는 이 정통의 훈련을 그만 접으라고 권했다. “아무것도 하지 마라.”

이 충고는 곤혹스럽다. 더 이상 마음의 훈련을 하지 말라니? 그럼 유속(流俗), 그 일상의 오염된 삶에 자족하고 살라는 뜻인가. 퇴계는 거두절미, “그저 바라보라”고 심심하게 말한다. “다만 일상의 분명한 곳을 그저 수용하고, 그 자리를 여유롭게 헤엄치며, 자의식의 과잉을 덜어내면, 그 사이에서 무엇인가가 길러지고 성숙되어 갈 것입니다.”

퇴계는 이 맛없는 관찰을 기대도 방기도 없이 “지속해 나가다 보면 마음의 병이 자연히 치유될 뿐만 아니라” 놀랍게도 밀쳐놓았던 “조존과 성찰의 효과까지 덤으로 얻게 된다”고 장담했다. 퇴계는 『언행록』등에서 이 비법을 자주 말한다. 비착의비불착의(非着意非不着意), 사물에 의지를 개입시키지도 말고, 그렇다고 사물 속에 몰각되지도 말라는 것이다.

理에는 안팎이 없다
퇴계는 젊은 선비에게 고백한다. “나는 젊은 시절, 이 호랑이에게 물려 고생했다. 그런데 깨우쳐 주는 사람이 없었다. 너무 놀라 나는 이 공부를 작파했다. 그리고 수십 년 세월이 그냥 흘러갔다. 나는 그것이 통탄스럽다. 그대는 내 실패를 거울삼아야 한다.” 그가 멀리해 온 수십 년은 과거시험을 거쳐 관로에서 지내던 시절과 겹쳐 있는 듯하다.

퇴계가 자신의 경험을 통해 들려주고자 하는 핵심은 분명하다. ‘마음’의 비밀을 알자고 직접 ‘마음’을 파고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 마음을 틀에 가두거나 억지로 몰아가면 병이 들기 십상이라는 것. 대안은 마음을 잊어야 한다는 것이다.이 심학의 역설은 남녀 사이의 교제와 닮은 바 있다. 상대방에게 관심이 있다면 관심이 없는 척,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이 좋은 전략이라지 않는가.

그는 마음이 아니라 마음 밖을 주목하라고 충고한다. “하물며 이 도리는 안팎의 틈이 없습니다. 밖을 삼가고 힘쓰면 그것이 곧 내 속을 기르는 방법이 됩니다. 그래서 공자 문하에서 심학(心學)을 내세운 적이 없지만 심학이 바로 그 가운데, (즉 일상의 사건과 행동에) 있었던 것입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고전한학과 철학을 가 르치고 있으며『주희에서 정약용으로』『조선유학의 거장들』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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