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어디에서든 들을 수 있는 "This stop is…" 주인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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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stop is 김포, 김포.” 최근 개통한 지하철 9호선을 탄 승객이라면 전철 내 방송되는 영어 안내를 듣고 낯익은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내가 이 목소리를 어디서 들었더라….’ 그도 그럴 것이 이 낭랑한 여성의 목소리는 지하철 1~4호선, 서울 시내버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 ARS, SK텔레콤 ARS 등에서도 들을 수 있다.

주인공은 EBS 영어강사 제니퍼 클라이드(35)씨. 서울 시민이라면 한번쯤은 그의 목소리를 들어봤을 것이다. 제니퍼 클라이드씨를 21일 서울 도곡동 EBS 본사 7층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그는 ‘영어회화 365’녹화 중이었다. 오똑한 코, 깊숙이 들어간 눈, 시원스런 이목구비는 전형적인 서양 미녀였다. 그녀는 한국어로 인터뷰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을 정도로 한국어에 능통했다.

-한국말을 어떻게 그렇게 잘하나?

“미국 시민권자다. 아버지는 미국인, 어머니는 한국인으로 나는 미국 펜실베니아주에서 태어났다. 4살 때 아버지 사업차 한국에 오게 됐고 서울국제학교를 다녔다. 이후 18세 때 다시 미국으로 들어가 뉴욕 파슨스디자인스쿨에 입학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한국에 다시 왔고 홍익대 산업디자인학과 2학년에 편입했다. 실내 인테리어 디자인을 전공했는데 지금은 이렇게 영어 강사를 하고 있다.”

-디자이너에서 영어 강사로 인생을 바꾼 계기는?

“대학생때 지인이 EBS 영어 녹음 아르바이트를 소개해줬다. 초등학생에게 알파벳을 노래로 들려주는 것이었다. ‘재밌겠다. 한번 해볼까’하는 생각에 첫 녹음을 했는데 지금까지 이 일을 하게 될 줄이야. 대학 졸업 후 아리랑TV와 EBSTV, 라디오DJ, 리포터, 각종 영어 교재 녹음, 동영상 강의 등을 했다.”

-전공인 산업디자인보다 영어 교육이 더 매력적이었나?

“디자인에 대한 아쉬움은 아직 남아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실내 인테리어쪽 일도 하고 싶다. 영어 방송은 너무 재밌다. 방송 그 자체가 즐거움이다. 또 이것은 ‘내가 매일 발전한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한국에 오래 있으면 아무래도 영어를 잊기 쉽지 않은가. 하지만 이 일을 하면 영어를 계속 쓸 수 있고 업계 사람들과 지내면서 영어 교육에 대한 공부를 지속적으로 할 수 있다.”

-지하철 영어 안내방송과의 인연은?

“6년 전, 서울메트로 의뢰로 안내 방송 목소리 샘플을 전달한 적이 있다. 메트로측에서 요구한 사항이 있었다. 영어 문장 중 지하철 역명은 반드시 한국식 발음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영어식 ‘This stop is 싸당’이 아니라 한국식 ‘This stop is 사당’이라고 발음해야 한다는 것. 한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기 때문에 내가 선택된 것 같다.”

-1~4호선 역명은 250여개다. 녹음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많았을 것 같은데?

“오래전 일이라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이틀 정도에 걸쳐 수십 개의 역 안내를 녹음했다. ‘This stop is’만 도대체 몇 번 한 줄 모르겠다. ‘내리실 문은 왼쪽’‘내리실 문은 오른쪽’. 1호선을 순서대로 쭉 말한 뒤 2호선…. 나중엔 뭐가 뭔지 헷갈렸다. 이후에 새로 생기는 역이 생기면 다시 가서 그곳만 녹음하곤 했다. 9호선 역시 올 봄에 녹음했는데 다행히 노선이 하나라 오래 걸리진 않았다. 얼마 전 서울시내버스 영어 안내 녹음을 했는데 5일이 걸렸다. 1~4호선 녹음할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힘들었다.”

-로고송은 분기별로 저작권료를 받는다. 안내방송은 녹음료 이외에 따로 받는게 있나?

“없다. 아르바이트 형식이라 일당으로 받았다. 녹음료를 궁금해하던데 1~4호선땐 많이 받지 못했다. 친구들에게 녹음료를 말해줬더니 눈이 동그래지면서 ‘말도 안돼’라고 하더라. 그땐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정말 적게 준 것 같다.(^^) 당시 한국인 성우는 훨씬 더 많이 받지 않았을까. 9호선 녹음땐 그동안 알고 지낸 사이라 그런지 조금 더 챙겨준 것 같다.”

-다른 것을 녹음하는지는 않았나?

“의뢰가 들어오면 녹음을 했지만 어떤 것을 했는지 솔직히 다 기억나지 않는다. 2년 전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전화기가 꺼져있으니 다시 전화하라는 영어 멘트가 나왔다.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 ‘누구지?’하고 곰곰이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내목소리 였다. 가족, 친구, 지인은 내 목소리가 나올 때 ‘보고 싶다’는 문자를 보내곤 한다. 한 동생은 ‘출퇴근할 때 매일 언니 목소리를 들어 지겹다’고 농담하더라. 예전에 남자친구는 ‘너와 헤어지면 절대 대중교통은 못타겠다’는 우스갯 소리도 했다.”

-영어 강의외에 이루고 싶은 다른 꿈이 있나?

“아이들을 위한 영어 유치원을 짓고 싶다. 영어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릴 때 다녔던 유치원 환경 등을 생각하며 문화를 가르치고 싶다. 그 꿈을 위해선 일단 지금 하는 일을 열심히 해야겠다. 아, 예전에 수학능력시험 영어 말하기 녹음 의뢰도 들어왔는데 일주일 동안 산속에 감금돼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못하겠다고 했는데 다시 한번 의뢰가 들어오면 이것도 해보고 싶다.”

글ㆍ사진=이지은 기자
제작 = 홍석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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