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북한의 준비된 도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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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휴전 이후 전개된 최초의 해상교전은 북한어뢰정의 격침으로 일단락됐으나 현재까지 전개돼 왔던 북한의 도발사례와는 차이가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부의 냉정하고 신속한 대응태세를 지켜보면서 서해에서 발생한 교전사태를 국내 정치문제로 비화시킬 필요는 없다고 본다.

중대한 국가안보 문제가 제기될 경우 여야가 있을 수 없다.

초당적이고 국민적인 합의를 바탕으로 한 전략과 정책이 국내외적으로 매우 긴요하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해교전이 담고 있는 다각적인 측면과 부분적인 의문점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동안 한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추진해온 대북전략과 전반적인 외교안보 전략을 총괄적으로 재점검할 적기로 삼아야 한다.

왜냐하면 실질적으로 발생한 특정위기보다 이를 바탕으로 어떠한 교훈을 얻고 정책에 반영하느냐가 관건이기 때문이다.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 (나토) 의 코소보 공습이 결국 실패하지는 않았으나 밀로셰비치 유고연방 대통령에 대한 미국의 외교적 마지노선이 누차 무너진 이후에 비로소 군사적 공격을 채택하게 됐다는 점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미국이 외교적 방법만으로 유고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교훈을 얻게 됐다면 한국과 미국도 북한과의 다각적인 협상을 시도하고 있는 과정에서 외교전략과 군사력의 밀접한 관계를 재인식할 필요가 있다 하겠다.

물론 한반도와 발칸지역의 안보상황은 다르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서해사태를 계기로 햇볕정책을 보다 강도높게 추진할 가능성이 있으며 군사적 충돌을 차제에 예방한다는 차원에서 억지력 보강보다는 외교적 협상에 더 많은 비중을 둘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럴 경우 서해사건은 포용정책의 당위성을 한층 더 강화하는 방향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크며 한국의 포괄적인 대북 전략 점검작업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시도하기도 전에 막을 내릴 것이다.

북한 경비정의 북방한계선 (NLL) 침범과 남북간의 함포사격 그 자체가 던져주는 문제를 분석함에 있어 위기관리 측면도 분명히 중요하지만 우선순위로 보았을 때 핵심적인 사건은 아닌듯 하다.

사실 북한은 우리가 설정한 북방한계선을 1970년대부터 노골적으로 무시해왔을 뿐만 아니라 북한의 외교.군사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다각적인 도발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은 북한의 계획된 도발로 인식할 수밖에 없으나 중요한 문제는 시기와 북한의 대응태세다.

북한은 이번 사건을 신속하게 보도했으며 대남보복을 위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확대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북한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으나 다음과 같은 경우를 상정할 수 있다.

첫째, 북한은 김대중 정부가 적극적으로 추진해온 포용정책을 시험하기 위해 서해에서의 교전을 계획, 실행에 옮겼다고 볼 수 있다.

그럴 경우 자명한 사실은 북한이 이번 사건을 통해 남한의 군사적인 대응태세보다는 정치적인 반응에 더 많은 비중을 둔 것으로 풀이되며, 한국정부가 군사적 충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포용정책을 고수할 것이라는 점을 미리 예측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북한은 해상교전에 따른 피해수준을 충분히 감수할 계획을 안고 작전에 임했을 것이다.

둘째, 북한은 대포동 1호 미사일 발사와 일본해역 침투 등으로 미국과 일본에 대한 준군사적 도전을 이미 시도한 바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서해사건을 계기로 미국.일본, 그리고 한국의 대응태세를 순차적으로 점검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았을 수 있다.

만일 북한이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이번 사건을 의도적으로 전개했을 경우 흔히 지적되고 있는 '한.미.일 공조' 의 내구력 측정보다는 각국의 위기관리능력 점검에 더 많은 무게를 실을 수도 있다.

즉, 한.미.일의 각기 다른 정치적 풍토와 국가이익을 보았을 때 결정적인 상황 속에서 이들의 독립적인 대응태세 및 의사결정과정을 면밀히 검토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서해사건은 한국군, 특히 해군의 탁월한 작전수행으로 일차적으로 종료됐으나 사건의 발단, 북한의 단계적인 침투전술, 그리고 제한된 군사적 공격자세 등을 감안했을 때 이번 서해교전은 지나치게 특정 시나리오에 의해 전개됐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안개 속에 깔려 있는 북한의 의도와 전략을 정확하게 판가름하는 데에는 늘 한계가 있으나 이번 사건은 왠지 모르게 석연치 않다.

이정민 연세대 국제대학원 교수.국제안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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