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진실과 화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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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남아프리카의 소수백인 지배를 수십년간 뒷받침한 아파르트헤이트 (분리) 정책은 20세기 후반의 가장 혹심한 인권탄압정책의 하나로 세계인의 지탄을 받았다.

93년 이 정책을 자진 포기한 데 클레르크 당시 대통령과 그에 협조해 흑백통합정권을 만들어낸 넬슨 만델라 현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함께 받은 것은 이 거대한 비극을 원만히 해소한 공로 때문이다.

아파르트헤이트에 저항해 온 아프리카민족회의 (ANC)가 다수흑인의 지지를 받아 통합정권의 주도권을 쥐었다.

ANC정권의 최대 과제는 과거청산이었다.

ANC정권은 '진실과 화해 위원회' 를 구성하고 인권운동의 대부 투투 대주교의 주재 아래 이 과제에 임했다.

진실과 화해 위원회의 기본원리는 과거 인권탄압의 진상을 밝히되 그 처벌은 최소화한다는 것이다.

개인적 동기에 의한 범죄는 처벌하지만 정치적 입장에 따라 행해진 인권침해 사례는 자수할 경우 사면대상으로 삼는다는 기준이 세워졌다.

피해자들에게는 미흡하게 느껴질 수 있는 기준이었다.

보장된 사면을 믿고 뻔뻔스런 태도를 보이는 죄인들도 있었다.

한 전직 경찰관은 대질신문에 나선 고문피해자에게 "당신은 참 쉽게도 불더구만. 30분도 안돼서 누구누구 이름을 대주지 않았소" 하고 비꼬며 상대방에게 도덕적 타격을 꾀한 일도 있다.

'정치적 입장' 을 사면조건으로 삼은 데도 문제가 있다.

고위층은 쉽게 빠져나가고 피라미 경찰만 걸리게 됐다는 것이다.

며칠 전 폭로된 84년 3월 19일의 국가안보회의 회의록에는 전직교사 고니웨를 '제거' 키로 한다는 기록이 있다.

이듬해 살해당한 고니웨의 암살계획은 그 회의 바로 이틀 뒤에 세워졌다.

당시 내무장관으로 회의에 참석했던 데 클레르크는 '제거' 의 뜻이 '다른 지역으로의 발령' 이었을 뿐이라고 변명한다.

'진실과 화해' 는 '과거와의 타협' 이란 비판도 그래서 일어난다.

과거의 압제자들과 결탁해 구체제의 뼈대를 유지하며 새로운 특권층을 형성했다는 것이 이번 주 선거에서 ANC에 대한 야당의 공격이다.

그래도 ANC의 낙승이 예상되는 것은 과거청산의 실적이 긍정적 평가를 받기 때문이다.

'화해' 를 앞세우지 않고는 '진실' 도 밝혀낼 수 없는 부득이한 사정이 '진실과 화해' 의 정책을 낳았지만 만델라와 투투의 도덕적 권위와 성실한 지도력이 정책의 성공을 가져왔다.

그 만델라가 오는 16일 퇴임을 앞두고 엊그제 고별식을 거행했다.

당파적 야욕에 흔들리지 않는 정책집행 자세가 정책의 원리보다 더 중요한 배울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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