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함형수 '해바라기의 비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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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가운 빗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 함형수 (咸亨洙.1914~46) '해바라기의 비명 (碑銘)'

저 1930년대 중반이면 근.현대사 속의 한국시를 근대시와 현대시로 구분하는 그 시점이기도 한데 시정 (詩情) 들은 가난 속에서지만 무척이나 훈훈하던 것이다.

서정주 등과 마음씨 좋은 '시인부락' 동인인데 하루 저녁 술 몇잔이면 큰 부자가 되어 '해바라기의 비명' 을 읊곤 했다.

영국 시에도, 프랑스 시에도, 독일 시편에도 더러 시인 자신의 묘비명을 미리 노래한 적이 있거니와 식민지시대의 빈 손 뿐인 시인에게도 해바라기의 사치와 보리밭.노고지리의 사치를 싸고도는 비명이 있어 마땅하여라.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라! 참 좋다.

이런 시 한두편 놓고 영영 가버린 나그네인가.

고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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