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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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며칠 전 퇴근길에 라디오를 켜니 여당 쪽의 국회의원들이 작성했다는 친일파 명단이 발표되고 있었다. 고봉경.민영미 등의 이름이 거명되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아나운서가 꽤 무식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미심하여 집에 도착해 인터넷을 열어보니 거기에도 고봉경과 민영미의 이름이 있었다. 나는 속으로 신음했다. 고봉경은 고황경(高凰卿)의 황(凰)자를 봉(鳳)으로 읽은 것이고, 민영미는 민영휘(閔泳徽)의 휘(徽)자를 미(微)자로 읽은 것이다. 놀랍게도 김화천수(金禾千洙)라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것은 김연수(金秊洙)를 그렇게 읽은 것이다. 나는 친일을 청산한다는 사람들이 매우 위험한 짓을 하고 있고, 어느 사람의 가슴에 주홍글씨를 새기면서 일을 너무 경솔하게 처리하고 있음을 걱정했다.

일제 침략과 친일 청산의 문제는 한국 현대사가 안고 있는 비극이며 해방 60년이 다 되도록 이를 청산하지 못한 것은 업장(業障)처럼 우리를 누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친일 문제를 청산한다는 문제는 언젠가는 해결하고 넘어가야 할 역사의 과제임에는 틀림없다. 문제는 그 의지와 방법인데 그것이 처음부터 몇 가지 점에서 잘못돼 가고 있다.

첫째로, 이 문제는 깊이 고민하고 공부한 사람들이 할 일이지, 공부가 부족해 봉황(凰鳳)도 구분하지 못하는 국회의원들이 나설 일이 아니었다. 이 문제에 정치인들이 깃발을 들었다는 것부터가 잘못됐고, 그 동기도 순수하지 않았다. 이것은 당초부터 학계가 맡아야 할 일이었고, 기왕에 이를 전문적으로 다루고 있는 민간단체의 활동이 활발한 터에 정부는 이 문제에 손을 대지 말았어야 했다.

둘째로, 지금의 친일파 청산 운동은 글자 그대로 친일파를 찾아내 단죄하자는 것이 아니라 친일파의 자식을 찾아내는 작업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여당의 당의장 아버지가 일본군 헌병 오장(伍長)이었고, 야당 대표의 아버지가 일본군 중위였다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는데, 일제 치하에서 오장이나 중위가 친일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위치로 볼 때 그 아들이나 딸이 여당과 야당의 당 대표가 아니었다면 이제 와서 문제가 될 일은 아니다. 그 당시 오장이나 중위가 한두 명이 아니었는데 왜 신기남 의원과 박근혜 의원의 아버지만 문제가 돼야 하는가? 이런 점에서 지금의 친일 논쟁은 정략적이다.

셋째로, 역사의 단죄란 모름지기 균형감각을 잃지 말아야 하는 것인데 지금의 친일 논쟁은 너무 비분강개(悲憤慷慨)해 있으며, 중용을 취하지 못하고 있다. 예컨대 노무현 대통령이 고이즈미 일본 총리를 만났을 때 자신의 재임 중에는 한.일 과거사 문제를 거론하지 않겠다고 단언했다. 한.일 과거사를 거론하지 않으려면 친일 문제도 거론하지 말았어야 옳았다. 한.일 과거사와 친일 문제는 한 꾸러미로 함께 가는 것이지 개별 문제가 아니다. 이런 점에서 친일 청산을 강변(强辯)하는 여당의 주장에 더 의혹이 있다.

넷째로, 우리는 일제의 특수한 성격을 고려해야 한다. 프랑스의 경우처럼 4년여의 지배가 아니라 사실상 반세기에 걸친 일본 식민지 지배 아래에서 친일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김구의 주장처럼 '당시 국내에 있던 사람은 모두 친일파였다'(M. Gayn, Japan Diary, p. 433)는 논리도 국내파 민족주의자의 아픔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온당하지 않으며, 이제 와서 친일 청산을 외치는 것도 '늦게 태어난 행운'을 남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경제도 어려운 지금의 상황에서 더 이상 무익한 소모전을 지속할 일이 아니라 여기에서 정쟁을 멈춰야 한다. 한 선지자가 이러한 사태를 예언하듯 말한 것처럼.'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신복룡 건국대 교수·정치사

*** 바로잡습니다

◆8월 19일자 34면 신복룡 교수의 시론 중 '봉황'의 괄호 안 한자표기 凰鳳은 鳳凰, 김연수의 한자표기 金秊洙는 金洙의 잘못이므로 바로잡습니다.